4월, 2025의 게시물 표시

게임 기획자라면 가지고 있어야 할 게임 시나리오 작성능력

이미지
게임기획개론 시나리오편(2)  게임 기획자라면 가지고 있어야 할 게임 시나리오 작성능력 앞선 글에서 게임 기획자와 게임 시나리오 작가는 별개의 전문 분야라고 언급했습니다. 실제로 미국이나 일본에는 전문 게임 시나리오 작가가 존재합니다. 공포 게임의 새로운 장을 연 <바이오 하자드>나 서바이벌 액션 게임의 명작으로 평가받는 <귀무자>는 캡콤의 자회사인 '플래그십'이라는 시나리오 전문 크리에이터 집단에 외주를 주어 탄생한 작품입니다. 에픽 게임즈 최초의 스토리 기반 TPS(3인칭 액션 게임)인 <기어스 오브 워>는 소설가를 시나리오 작가로 고용하여 게임을 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일본이나 미국에서도 일부 선택받은 회사들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미국과 일본에 비해 한국의 게임 개발 환경은 아직 그렇게 여유롭거나 풍족하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많은 경우, 게임 기획자가 '올라운드 플레이어'가 되기를 기대하며, 게임 시나리오 역시 게임 기획자가 겸임해서 작성해주기를 바랍니다. 이런 상황에서 "게임 기획과 게임 시나리오는 별개이니 다른 사람을 고용해야 한다"고 주장해 봐야, 회사 사정도 모르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기 쉽습니다. 사실 게임 개발의 초기에는 개발자 한 명이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수행했습니다. <울티마> 시리즈의 경우, 리처드 개리엇이 혼자서 게임 기획, 시나리오, 그래픽, 프로그래밍까지 모두 담당했습니다. 심지어 게임 패키지 판매를 위해 직접 표지를 그리고 포장까지 했습니다. 이러한 1인 개발 체제는 명예의 전당에 오른 게임 크리에이터 시드 마이어(<문명> 시리즈)와 윌 라이트(<심시티>, <심즈>) 역시 경험했던 제작 현실입니다. 일본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미야모토 시게루는 <동키콩>을 개발할 때 기획뿐만 아니라 그래픽 작업을 혼자서 다 했으며, 음악 작곡까지 참여했습니다. <버추어 파이터>의 스즈키 유...

게임 시나리오 작가는 기획자를 뜻하지 않는다.

이미지
게임기획개론 시나리오편(1) 게임 시나리오 작가는 기획자를 뜻하지 않는다.   게임 시나리오 작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오해가 존재한다. 그 중에서 가장 심각한 부분은 게임 시나리오 작가는 곧 기획자라는 착각이다. 그래서 게임 시나리오라는 것은 기획자의 업무중에 하나정도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이는 크나큰 착각 중에 하나다. 게임 기획자는 게임에 대한 아이디어와  비전을 가지고서 게임이 완성될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하는 항해사와 같은 존재이다.  그래서 게임 기획자는 현장의 최전선에서 실질적으로 게임을 개발하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설계와 관리 그리고 감리를 맡는 사람이다.  게임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애플의 CEO인 스티브 잡스가 바로 기획자의 좋은 예이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 컴퓨터를 개발하는데 있어서 코드 한 줄도 작성하지 않았으며 그리고 컴퓨터 내부의 납땜하나도 하지 않은 사람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스티브 잡스를 개인용 컴퓨터의 아버지라고 추앙한다. 실질적으로 컴퓨터 개발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애플 컴퓨터가 완성될때의 모습을  팀원들이 상상하게 만들었고 비전을 제시하여서 모든 개발자들의 힘을 하나로 모아서 개인용 컴퓨터를 총지휘를 하는 한편 물심양면으로  제작자들을 후원했다. 컴퓨터 개발자들이 최상의 환경에서 작업 할 수있도록 직접 마루도 청소하였고 식사를 준비했고 비스킷 같은 과자도 사다 날랐던 것이다. 또한 컴퓨터가 완성된 후에는 철저하게 사용자의 입장에서 제품을 평가하였고 수정해야 할 점을 정확하게 지적해서 애초에 기획된 방향으로 개발을 이끌어 갔다. 맥킨토시나 아이팟에서도 스티브 잡스가 제작부분에서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역시 새로운 프로젝트를 고안했으며 팀원들의 힘을 하나로 모아서 하나의 제품을 개발할 수 있도록 기획하였다.  여담으로 이야기하자면 스티브 잡스의 첫 번째 직장은 우리에게 벽돌깨기로 잘 알려진 브레이크 아웃의  제작에 참여했다. 아타리의 사장인 놀란 부쉬넬에게서...

e스포츠 판도를 바꾼 리그 오브 레전드 이야기(aka LOL 또는 롤)

이미지
LoL(리그 오브 레전드)의 제작사 라이엇 게임즈를 창업한 브랜든 벡 대표는 LA 코리아타운 근처에 살았던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한국 음식과 한국 음악에 빠져 살았다. 그런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한국인 친구가 데려간 한국식 PC방이었다. 그곳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카운터 스트라이크나 스타크래프트 같은 게임을 열심히 했다. 그는 이때부터 혼자서 하는 게임보다는 여럿이 함께 즐기는 네트워크 게임에 더욱 빠져들었다. USC 대학에 입학한 브랜든 벡은 훗날 라이엇 게임즈를 공동 창업하게 되는 마크 메릴을 만났다. 둘은 매우 다른 사람이었다. 브랜든 벡은 ADHD를 앓고 있었으며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대학에 들어갔다. 반면에 마크 메릴은 고등학교 풋볼팀 주장을 맡을 정도로 활발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게임을 사랑한다는 공통점이 있었고, 둘은 게임을 매개로 영혼의 단짝 친구가 되었다. 둘은 대학 파티도 빠지고 함께 게임을 즐겼다고 한다. 열심히 PC방을 다니던 둘은 새벽까지 게임을 하고 나면 한인타운의 음식점을 찾아 순두부찌개를 함께 먹었다고 한다. 이때의 좋았던 기억은 둘이 회사를 창업한 후에도 계속된다. 라이엇 본사에는 한국식 PC방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직원 휴게실이 있으며, 이곳에는 한국 과자와 라면이 가득 차 있다. 또한 라이엇 게임즈는 한국 문화유산 보호와 지원을 위한 사회 활동에 52억 원을 후원했고, 국외로 반출된 척암 선생 문집을 경매를 통해 한국에 다시 환수하기도 했다. 둘은 게임을 무척 사랑했지만 전공은 경영학으로 게임과는 거리가 멀었다. 브랜든 벡은 졸업 후 세계적인 컨설팅 회사인 베인앤드컴퍼니에 취직했고, 마크 메릴은 US뱅크의 애널리스트로 일하게 되었다. 영혼의 단짝 친구라고 할 수 있는 둘은 아파트를 임대해서 함께 지냈다. 그리고 게임에 대한 사랑은 취직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아파트에는 가구가 거의 없었고, PC방처럼 책상과 거대한 모니터, 컴퓨터만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게임을 즐기던 둘은 문득 게임 회사들이 고객을 별로 신...

슈퍼셀, 실패를 축하하는 기업문화로 '클래시 오브 클랜' 신화를 쓰다(feat. 손정의의 투자)

이미지
슈퍼셀의 창업자 일카 파나넨 슈퍼셀의 창업자이자 CEO인 일카 파나넨은 어린 시절부터 닌텐도의 '슈퍼 마리오'와 '젤다의 전설'을 좋아했던 열렬한 게이머였다. 대학에 진학한 그는 게임 제작을 꿈꾸던 '수미아(Sumea)'라는 팀을 알게 되었다. 당시 수미아에는 3명의 개발자가 있었는데, 놀랍게도 개발 능력이 전혀 없던 파나넨에게 합류를 제안했다. 그들이 파나넨을 영입하려 했던 이유는, 수미아를 정식 회사로 키우기 위해서는 개발자뿐만 아니라 개발 외적인 업무를 지원해 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파나넨은 이후 수미아의 CEO가 되면서 팀원들로부터 리더십을 인정받게 된다. 2000년, 수미아를 정식으로 창업한 파나넨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임무는 투자 유치였다. 하지만 인터넷 버블 붕괴 직후라 투자를 받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은 소수의 고객에게 게임을 판매하며 겨우 회사를 유지했다. 수익이 거의 없었기에, 수미아에 합류한 네 명은 극도로 절약해야 했다. 그들은 아파트 한 곳에 모여 살면서 개발을 계속해 나갔고, 월급은 당연히 꿈도 꾸지 못했다. 파나넨 자신도 1년 6개월 동안 월급 한 푼 받지 못했다. 팀원들은 당장 돈이 필요한 동료가 생기면 각자 가진 돈을 모아 도와주며 서로를 격려했고, 포기하지 않고 어려움을 버텨냈다. 고생 끝에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2002년 후반, 컬러 스크린을 탑재한 휴대폰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모바일 게임 시장이 열린 것이다. 수미아는 발 빠르게 컬러폰용 게임 개발에 매진했고, 드디어 수익을 창출하기 시작했다. 운도 따랐다. 인터넷 버블 붕괴 과정에서 수많은 게임 회사들이 도산하면서 경쟁 개발사의 수가 급감했고, 덕분에 수미아는 비교적 수월하게 사업을 확장할 수 있었다. 당시 23세였던 파나넨은 유럽 전역을 누비며 이동통신사들과 게임 공급 계약을 맺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이 과정에서 핀란드 기업인 노키아의 도움도 컸다. 노키아를 통해 여러 이동통신사를 소개받을 수 있었...

빌 게이츠, 성공 신화 너머: 놀라운 10가지 비하인드 스토리

이미지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 빌 게이츠는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의 성공 신화 이면에 숨겨진 인간적인 면모나 흥미로운 일화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오늘은 빌 게이츠의 의외의 모습과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10가지를 소개합니다. 1. 빌 게이츠는 지기를 싫어하는 승부욕의 화신입니다 빌 게이츠를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 중 하나는 바로 '승부욕'입니다. 지는 것을 싫어하고 항상 이기려는 열망은 어린 시절부터 그의 능력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었다고 합니다. 누나와 퍼즐 게임을 하거나 썰매를 탈 때도 절대로 지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다고 전해집니다. 한 번은 그가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이 '산상수훈'을 다 암송하는 사람에게 고급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사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자 빌 게이츠는 단 두 시간 동안 성경책을 읽고서 산상수훈을 전부 암기했다고 합니다. 이는 깊은 신앙심보다는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승자가 되려는 타고난 승부욕이 발동한 결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빌 게이츠가 어린 시절부터 가장 즐겨하고 좋아했던 놀이는 브리지 게임입니다. 승자와 패자가 명확히 가려지는 경쟁에서 승리하는 데 집착했던 그가 카드 게임에 빠져든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시험을 괴로운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는 오히려 자신의 실력을 테스트하는 시험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빌 게이츠는 학교에서 시행하는 읽기 시험에서 여러 번 일등을 했는데, 그의 아버지는 그것이 지기 싫어하는 빌 게이츠의 성격 덕분이라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남에게 뒤처지기 싫어하는 성격은 이른바 '보이스카우트 사건'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보이스카우트 여름 캠프에는 80km를 행군하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빌 게이츠 역시 행사에 참여했는데, 문제는 새로 산 신발 때문에 얼마 못 가서 발뒤꿈치가 까졌습니다. 상처는 더욱 심각해져서 발에서 피가 나오기 시작했지만, 빌 게이츠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행군했습니다. 행군의 절반...

퍼즐앤드래곤: 단 하나의 게임으로 닌텐도를 넘어섰던 신화

이미지
  겅호 엔터테인먼트의 창업자 손태장은 1972년 사가현 토스시에서 4남 중 막내로 태어난다. 그의 형 손정의와는 무려 15살의 차이였다. 그의 아버지는 어린 시절 손정의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그를 가르쳤다. 항상 무슨 일이든지 천재라면서 손태장을 격려하였고, 아버지의 사업과 관련해서 여러 가지 의견을 물어봄으로써 사업 감각을 익히도록 하였다. 질문에 답할 때마다 아버지는 역시 천재라면서 격려를 해주었다. 손태장이 중학교를 다닐 때는 이미 손정의가 소프트뱅크를 통해서 어느 정도 사업에 성공했을 때이다. 명절에 집으로 돌아온 손정의는 몽골 제국이 적은 군인들로 어떻게 그렇게 광활한 땅을 지배하였는지, 오다 노부나가가 일본의 패권을 이루어낸 이유가 무엇인지를 두고서 가족들과 몇 시간씩 대화를 나누었다. 손태장은 형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역사와 사업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게 된다. 밴드와 연극 활동을 동시에 할 정도로 활발한 성격의 손태장은 교우 관계도 좋았고 학생회장이 되어서 주변 사람으로부터 인정도 받는 행복한 청소년기를 보낸다. 그렇게 행복한 날들만 있을 줄 알았던 그에게 시련이 찾아온다.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재수를 하게 된 것이다. 이를 본 손정의는 손태장을 호출해서 두 시간이 넘게 설교를 늘어놓는다. 손정의는 손태장에게 일주일을 7일이 아니라 9일로, 그리고 1년을 12개월이 아닌 14개월로 나누어서 계획을 세우도록 조언한다. 그리고 계획표에 계획대로 진행되면 녹색, 계획보다 늦게 진행된 것은 노란색, 진행되지 않은 것은 빨간색으로 표시하도록 하였다. 그러면서 노란색으로 표시된 것을 갈수록 줄이도록 노력하라고 조언하였다. 손태장은 손정의의 말을 따랐고, 하루 18시간이 넘는 공부 끝에 도쿄대학교 경제학부에 입학하게 된다. 손태장은 대학교에 입학은 했지만 막상 하고 싶은 일은 없었다. 적극적으로 취업 활동도 안 하고 그렇게 세월을 보내던 중에, 손정의가 야후에 투자를 하고 야후 재팬을 출범시킨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손정의가 주변에 인터넷을 잘 아는 친...

아이폰 혁명이 키운 게임 엔진 제국, 유니티 이야기

이미지
 아이폰이 기존 스마트폰이 일으키지 못한 혁명을 만들어 낸 데에는 앱스토어의 존재가 결정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앱스토어의 인기 순위를 살펴보면, 상위권은 게임들이 독식하고 있습니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3월 14일 기준으로 앱스토어 최고 매출 순위를 보면, 1위부터 10위까지 카카오톡과 카카오페이지를 제외한 모든 앱이 게임이었습니다. 20위까지 확장하면 17개가 게임이었습니다. 어느 나라의 앱스토어 최고 매출 순위를 보더라도 상위 10개 앱 중 80% 이상은 게임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아이폰의 힘은 앱스토어에서 나오는데, 사실 그 앱스토어는 게임의 천국이었던 셈입니다. 매킨토시 시절 게임에 소극적이라는 평가를 받던 애플은 아이폰 시대에 들어서 확연히 달라진 태도를 보였습니다. 게임 콘퍼런스에 직접 참가해 자사의 플랫폼을 홍보하고, 자사 기기들이 최고의 게임기임을 강조했습니다. 마케팅에도 게임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아이폰에서 통화 기능을 뺀 아이팟 터치를 '게임 콘솔 중 베스트셀러'라며 자화자찬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스티브 잡스는 처음에는 아이팟 터치를 어떻게 마케팅해야 할지 몰랐지만, 사람들이 이를 게임기로 인식하는 것을 보고 마케팅 방향을 게임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게임 분야에서 이뤄낸 성과에 만족했는지, 스티브 잡스는 D8 콘퍼런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이폰과 아이팟 터치가 새로운 형태의 게임을 창조해내었음은 분명합니다. 캐주얼 게이밍의 부분집합이지만 어떤 게임들은 매우 놀랍습니다. 그래픽 측면에서 보면 콘솔 게임처럼 훌륭하지요. 콘솔 게임은 30달러에서 40달러이지만 아이폰의 게임은 더욱 저렴합니다. 그래서 시장이 폭발하고 있습니다.” IT 세계에 새로운 시대가 열릴 때마다, 그 변화를 촉진하며 실질적인 이득을 얻는 대표적인 분야가 바로 게임 산업입니다. 바로 앞장에서 소셜 게임에 대해 논했지만, 소셜 게임의 화려했던 영광은 이제 과거가 되었습니다. 한때 100억 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평가받던 징가(Zynga)는 이제...

디아블로 스타크래프트 신화를 만든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 빌로퍼

이미지
      "게임 패키지에 적힌 회사나 게임 제목이 중요한 게 아니야. 사람들은 영화를 고를 때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나오는지, 스티븐 스필버그가 감독했는지를 보잖아. 책을 살 땐 작가가 누구인지 보는 것과 같지. 해리 포터의 J.K. 롤링처럼 말이야. 이렇듯 게임은 사람이 만드는 거야. 게임을 선택할 때는 누가 만들었는지를 보는 게 중요해." 빌 로퍼는 이 말처럼, 이름만으로도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만드는 게임 크리에이터 중 한 명이다. 해외에서도 그의 명성은 자자하지만, 솔직히 '게임 명예의 전당'에 오른 거물들에 비하면 아직 무게감이 조금은 부족하다는 평가도 있다. 세계적인 게임 웹진 '게임스파이'가 선정한 '게임계 영향력 있는 인물 30인'에 그의 이름이 빠졌을 정도니까. 그가 이끈 <스타크래프트>는 전 세계적으로 600만 장 이상 팔리며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이 숫자만 보면 대단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국에서만 무려 375만 장이 팔렸고, 나머지 해외 지역에서는 230여만 장 판매에 그쳤다. <스타크래프트>가 완전히 새로운 시스템을 선보인 게임은 아니었기에, 그의 명성은 상업적인 성공과 함께 가야 했다. 해외 판매량 230만 장은 훌륭한 게임 기획자의 성적표로는 나무랄 데 없지만, '위대한' 기획자로 불리기에는 살짝 아쉬운 수치일 수 있다. 그렇다고 빌 로퍼를 얕보는 건 절대 아니다. 그가 블리자드 노스 부사장직을 그만둔다고 했을 때, CNN은 이 소식을 속보로 전하며 "블리자드가 보석을 잃었다"고 표현했다. 그의 가치를 1억 달러 이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아직 명예의 전당 최상위권은 아닐지 몰라도, 언젠가는 그 자리에 오를 잠재력을 가진 인물임은 분명하다. 그가 참여한 <디아블로>는 출시된 해에 '최고의 게임'으로 뽑혔고, <스타크래프트>는 '최고의 전략 게임'으로 선정되었다. 게임...

롤플레잉 게임의 개척자 MMOPRG의 현재를 만든 리처드 게리엇

이미지
"우리는 실감 나는 시뮬레이션과 기술적인 혁신으로 세상을 창조한다. 우리는 인터랙티브 엔터테인먼트에 지금까지 비교할 수 없는 정성을 다하여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며 세상을 창조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는 재미있는 세상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리처드 개리엇은 오늘날 게임 산업을 이끈 개척자 중 한 명이다. 1970년대부터 게임을 개발한 미야모토 시게루가 일본을 대표하는 크리에이터라면, 그는 미국을 대표하는 크리에이터이다. 미야모토 시게루가 오늘날 일본이라는 세계 게임 강국을 만드는 데 공헌했다면, 그는 미국 컴퓨터 게임 산업의 시작과 함께하며 오늘날과 같은 발전을 이끌어낸 인물이다. 사실 1980년대 초반만 해도 컴퓨터 게임은 그저 한때 유행하다 사라질 것으로 여겨졌다. 컴퓨터에 미친 사람들이나 즐기는 특이하고 기괴한 놀이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 1970년대 후반 보통 사람들의 인식이었고, 사실 그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 역시 대학에 들어가기 전, 여름방학을 이용해 애플 II 컴퓨터로 단지 취미 삼아 심심풀이로 게임을 개발했다. 혼자서 프로그래밍부터 그래픽까지 게임 제작의 모든 것을 담당한 그 게임이 바로 세계 최초의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CRPG)으로 불리는 '알카라베스(Akalabeth)'이다. '반지의 제왕'으로 탄생한 판타지 세계와 테이블 토크 롤플레잉 게임(TRPG)으로 불리는 '던전 앤 드래곤스'가 컴퓨터 속에 그대로 구현된 이 게임은 세계 컴퓨터 게임 역사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모두들 머릿속으로는 톨킨이 탄생시킨 판타지 세계와 '던전 앤 드래곤스'를 컴퓨터 속에서 재현하려 했지만, 그것은 그저 상상에 그쳤던 일이었다. 하지만 리처드 개리엇은 혼자서 그 일을 해낸 것이었다. '알카라베스(Akalabeth)'를 개발한 애플 II 컴퓨터는 현재 박물관에 전시될 정도이니, 그 게임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여러분도 약간은 상상...

게임의 신, 미야모토 시게루 2부: 놀이, 삶, 그리고 창조의 철학

이미지
 창조적 인재에게 필요한 확고한 자기 믿음 미야모토 시게루는 게임을 만드는 과정에서 항상 주변의 반대에 부딪혔다. <동키콩>을 처음 선보였을 때, 그 가치를 알아본 사람은 야마우치 사장이 거의 유일했다. 심지어 <동키콩>을 본 닌텐도 미국 지사 직원들 중 일부는 회사가 곧 망할 것이라 생각하고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려 했을 정도였다.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를 만들자고 했을 때는 "왜 또 마리오로 게임을 만드느냐"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지만, 결국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게임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젤다의 전설>을 개발할 때는 게임이 너무 어렵다는 비판을 들어야 했지만, 출시 후에는 뛰어난 작품성으로 전 세계적인 찬사를 받았다. 비단 미야모토뿐만이 아니다. 무언가 새로운 시도를 하려는 사람들은 대부분 주변의 부정적인 시선 때문에 좌절감을 맛본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 창업 초기 투자 유치를 위해 돈 밸런타인을 찾아갔다가 '미치광이' 소리를 들어야 했고, 구글 창업자들은 자신들이 만든 검색 엔진을 아무도 사주지 않자 직접 회사를 창업할 수밖에 없었다. 앤디 그로브가 인텔의 '인텔 인사이드' 마케팅 캠페인을 시작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광고 회사에 돈을 버리는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비난했다. 진정으로 새로운 것은 처음부터 그 가치를 인정받기 어렵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의 경험과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세상을 바라본다. 하지만 창조적인 인재들은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는 신선하고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그러니 기존의 틀로 사물을 판단하는 일반 사람들이 창의적인 아이디어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는 것은 당연히 어렵다. 델 컴퓨터의 창업자 마이클 델은 "사업을 할 때는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지 말라"고까지 말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틀을 넘어서야 하는데, 일반 사람들은 과거의 방식과 관습으로 조언하기 때문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이클 델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