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플레잉 게임의 개척자 MMOPRG의 현재를 만든 리처드 게리엇




"우리는 실감 나는 시뮬레이션과 기술적인 혁신으로 세상을 창조한다. 우리는 인터랙티브 엔터테인먼트에 지금까지 비교할 수 없는 정성을 다하여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며 세상을 창조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는 재미있는 세상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리처드 개리엇은 오늘날 게임 산업을 이끈 개척자 중 한 명이다. 1970년대부터 게임을 개발한 미야모토 시게루가 일본을 대표하는 크리에이터라면, 그는 미국을 대표하는 크리에이터이다. 미야모토 시게루가 오늘날 일본이라는 세계 게임 강국을 만드는 데 공헌했다면, 그는 미국 컴퓨터 게임 산업의 시작과 함께하며 오늘날과 같은 발전을 이끌어낸 인물이다.

사실 1980년대 초반만 해도 컴퓨터 게임은 그저 한때 유행하다 사라질 것으로 여겨졌다. 컴퓨터에 미친 사람들이나 즐기는 특이하고 기괴한 놀이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 1970년대 후반 보통 사람들의 인식이었고, 사실 그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 역시 대학에 들어가기 전, 여름방학을 이용해 애플 II 컴퓨터로 단지 취미 삼아 심심풀이로 게임을 개발했다. 혼자서 프로그래밍부터 그래픽까지 게임 제작의 모든 것을 담당한 그 게임이 바로 세계 최초의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CRPG)으로 불리는 '알카라베스(Akalabeth)'이다.

'반지의 제왕'으로 탄생한 판타지 세계와 테이블 토크 롤플레잉 게임(TRPG)으로 불리는 '던전 앤 드래곤스'가 컴퓨터 속에 그대로 구현된 이 게임은 세계 컴퓨터 게임 역사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모두들 머릿속으로는 톨킨이 탄생시킨 판타지 세계와 '던전 앤 드래곤스'를 컴퓨터 속에서 재현하려 했지만, 그것은 그저 상상에 그쳤던 일이었다. 하지만 리처드 개리엇은 혼자서 그 일을 해낸 것이었다. '알카라베스(Akalabeth)'를 개발한 애플 II 컴퓨터는 현재 박물관에 전시될 정도이니, 그 게임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여러분도 약간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최초보다는 대중화시키는 것이 더 어려운 법이다. 필자는 그 대중화라는 것에 더 의미를 부여하는 편이다. 서태지 이전에도 랩은 있었지만, 누가 그들을 모두 인정했던가? 비틀즈 이전에도 록을 했던 사람은 있었지만, 록을 대중화시킨 비틀즈가 최고라는 소리를 듣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 의미에서 리처드 개리엇의 '울티마(Ultima)'는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을 대중화시킨 역작 중의 역작이다.

컴퓨터 게임 역사상 가장 오래된 시리즈 중 하나로 기록되는 울티마를 통해 그는 최초의 던전을 구현했고, 최초로 야외 맵을 선보였으며, 혁신적인 타일 방식의 스크롤로 세계 컴퓨터 게임의 역사를 새롭게 썼다. 이러한 그의 신화는 '울티마 온라인(Ultima Online)'을 통해 절정을 이루게 된다. '울티마 온라인'이 과연 온라인 게임의 최초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중 하나로, 한국에서는 '바람의 나라'가 최초라는 타이틀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울티마 온라인'이 전 세계 MMORPG(대규모 다중 사용자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 시장의 시작을 알렸으며, 많은 개발자에게 영감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아직도 전 세계의 게임 유저들은 '울티마'가 처음 서비스되었을 때를 잊지 못하고 있으며, 현재 온라인 게임을 개발하는 사람들은 '울티마 온라인'에서 받은 자극으로 컴퓨터 온라인 게임계에 뛰어들었다고 서슴없이 말할 정도다. 이렇게 개척자 정신으로 세계 최초의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을 만들고 대중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혁신적인 MMORPG의 선구자로서 그의 전설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이제 본격적으로 알아보자.

<아하!> 울티마의 의미

리처드 개리엇 최고의 히트작인 울티마(Ultima)는 어디서 그 의미가 왔을까? 바로 영어 단어 'ULTIMATE'에서 어감상 'TE'를 탈락시켜 만든 단어이다. 그래서 ULTIMA는 '최후의' 혹은 '궁극적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환상 세계에 눈뜨다

리처드 개리엇은 우주 연구소에서 우주 비행사로 일하는 아버지 오언 개리엇(Owen Garriott)의 아들로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후 두 달 만에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의 교수로 임명되었고, 이때 리처드 개리엇은 미국 텍사스 오스틴으로 이사 오게 된다. 그의 집안은 정말 학구적인 분위기의 전형과도 같았다. 아버지는 대학교수이고 어머니는 예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큰형은 나중에 의사가 되고, 다른 형도 석사 학위를 받게 된다. 그의 여동생 또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명문 대학으로 일컬어지는 텍사스 대학을 나온 그가 어린 시절 공부 때문에 기가 죽을 정도였다고 하니, 정말 대단한 집안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는 휴스턴에 있는 클리어 클릭 고등학교 시절을 잊지 못한다. 고등학교 시절의 여러 경험이 현재의 세계적인 게임 크리에이터가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우선 그에게 평생 따라다니는 닉네임인 '로드 브리티시(Lord British)'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는 부모님의 영향으로 영국식 억양을 사용했는데, 학교 선배들이 그의 그런 말투에 '로드 브리티시'라며 별명을 붙여주었던 것이다. 평소부터 자신은 영국의 귀족 출신이라고 생각했던 그였기에, '로드 브리티시'라는 별명에 자부심을 느끼면서 마음에 쏙 들어 했다.

형수로부터 받은 판타지 소설 '반지의 제왕'도 그에게는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그는 '반지의 제왕'을 읽으면서 자신이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간 듯한 착각에 빠졌다고 할 정도로 책에 매료된다. 그는 이후 각종 판타지 소설을 독파하였다.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직접 판타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때의 자작 소설들이 현재의 위대한 게임 스토리텔러가 되는 데 큰 자양분이 된다.

고등학교 시절의 그는 완벽한 판타지 마니아가 되었다. 그래서 판타지와 관련된 모든 것을 수집하고 여러 가지 활동을 하였다. 그가 판타지를 소재로 한 보드 게임의 일종인 TRPG(Tabletop Role Playing Game) '던전 앤 드래곤스(Dungeons & Dragons)'에 빠져드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1974년에 등장한 TRPG인 '던전 앤 드래곤스'는 '반지의 제왕'을 게임 속에 구현하여 많은 사람을 열광의 도가니 속으로 몰고 간 게임이었다. 당시에는 '던전 앤 드래곤스'에 빠져든 청소년들이 학업에 소홀해지자 사회 문제가 될 정도였다. 이 때문에 학부모 단체에서는 비교육적인 게임이라며 판매 금지 운동을 펼치기까지 하였다. '던전 앤 드래곤스'에서 게임 마스터는 어떤 목표가 되는 이야기를 만든 후 규칙에 따라 게임을 진행한다. 그러면 참여자는 각자의 역할을 맡아 실제 연기도 하면서 주어진 상황을 잘 헤쳐나가고 적들을 물리쳐야 한다. 매일 친구들과 모여서 '던전 앤 드래곤스'를 즐기던 그는 어느 날 컴퓨터를 처음 본 순간, 왠지 모르는 흥분을 느끼게 된다.

컴퓨터와의 만남과 첫 게임 개발




그는 컴퓨터를 통해서 자신이 무엇인가를 이룩하게 될 것이라고 직감했던 것이다. 과학자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는 이미 유치원 때부터 과학과 수학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실제로 두 과목의 성적은 항상 A 학점이었고, 선생님이 없는 가운데 학습 토론을 하면 리처드 개리엇이 항상 앞장서서 주도하였다. 그는 특히 시간이 날 때마다 과학적인 지식을 이용하여 뭔가를 만들어내는 과학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주로 과학 현상을 설명하는 실습 자료였다. 그러던 차에 컴퓨터의 등장은 그에게 과학적 호기심을 다시 한번 발동시킨다. 그리고 그의 천재성을 발휘하는 계기가 된다.

어느 날 그의 고등학교에서는 정부의 지원으로 컴퓨터를 얻게 되었다. 문제는 정작 아무도 그 컴퓨터를 사용하는 법을 몰랐다는 것이다. 물론 학교에는 컴퓨터 관련 교육 과정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교장 선생님에게 컴퓨터 프로그래밍 과목을 만들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교장은 교육을 시켜줄 선생도 없고 참고할 만한 교과서도 없다면서 그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하지만 희망하는 학생들을 모아서 자체적으로 공부하면서 수업을 진행하겠다고 리처드 개리엇이 포부를 밝히자, 결국 교장은 그의 의지를 믿고서 그의 소원대로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교과 과목으로 인정하기로 결정한다. 이렇게 컴퓨터 프로그래밍 반을 만든 그는 친구들을 규합해서 컴퓨터 게임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그는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던전 앤 드래곤스'를 컴퓨터 게임으로 구현하고자 하였다. 사실 그가 컴퓨터를 보자마자 게임을 만들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 자체로도 엄청난 발상이었다. 당시만 해도 게임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다른 세상의 얘기였을 뿐이다. 게다가 '퐁(Pong)'처럼 간단한 테니스 게임이나 존재했던 세상에 이미 롤플레잉 게임을 구현하려고 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가 컴퓨터를 처음 접했던 그 시기만 해도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가르치던 학교도 학원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결국 그는 독학으로 컴퓨터 게임을 개발하려고 마음먹었다. 게다가 당시만 해도 컴퓨터에 프로그래밍을 한다는 것은 지금처럼 키보드로 코딩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때는 텔레타이프(teletype) 용지에 구멍을 뚫어 코딩을 하던 시대이다. 프로그래밍 언어의 형식대로 코딩을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특수 용지에 구멍을 뚫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인내력을 요구하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도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오직 학교 친구들과 함께 자체적인 프로젝트로 컴퓨터를 연구해서 게임을 개발한 것이었다. 그는 이때 '던전 앤 드래곤스'를 게임으로 만든다는 의미에서 게임 이름에 'D&D'라는 프로젝트명을 사용하였다. 그는 고등학교 내내 만든 게임이 무려 28개인데, 이들 게임의 명칭은 모두 D&D1부터 D&D28과 같은 형식으로 지었다.

그가 이렇게 결과물을 내놓자 학교 선생님은 그에게 과학 점수 A 학점을 주며 그의 공로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의 호기심과 과학적 탐구심, 그리고 시대를 앞서가는 아이디어와 인내심이 만들어낸 성공적인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그리고 학창 시절의 이런 소중한 경험이 오늘날의 리처드 개리엇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세계 최초의 컴퓨터 RPG, 알카라베스

이공계 학과에서 미국의 명문 대학의 하나로 손꼽히는 텍사스 대학에 합격한 리처드 개리엇은 대학에 입학하기 전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컴퓨터랜드(ComputerLand)'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컴퓨터랜드는 애플 컴퓨터와 소프트웨어, 그리고 각종 소모품을 파는 컴퓨터 상점이었다. 그는 매장에 있는 애플 II 컴퓨터를 이용해서 게임을 개발할 결심을 한다. 그리고 그는 놀랍게도 세계 최초로 그래픽을 지원하는 롤플레잉 게임으로 인정받는 '알카라베스(Akalabeth: World of Doom)'를 전격적으로 개발한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지를 전혀 몰랐다. 단지 컴퓨터 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니깐 자신의 게임을 상점에서 팔 수 있을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을 가졌을 뿐이다. 게임을 완성한 그는 200달러를 들여서 직접 디스크에 게임을 복사하고 플라스틱 지퍼백으로 포장을 하였다. 그리고 게임 매뉴얼을 직접 쓰고 사진까지 찍어서 게임 설명을 덧붙였다. 게임 개발에서부터 포장, 그리고 상품 판매까지 혼자서 모든 것을 처리하는 원맨(one-man) 제작 시스템의 진수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 사례이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이야기지만, 1979년만 해도 게임은 만들어서 판다는 개념이 아니라 마니아들이 게임을 만들어서 서로 복사하거나 교환한다는 인식이 강했던 때이다. 게임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했고, 게임을 만들어서 판다는 것은 더더욱 상상하기 힘들었을 때, 리처드 개리엇은 그 모든 것을 혼자 힘으로 다 헤쳐 나간 것이다. 고작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열아홉 살의 나이에 말이다.

그는 일주일 동안 알카라베스를 모두 다섯 개밖에 팔지 못하여 약간 실망한다. 그러던 차에 마침 그의 게임을 좋아했던 컴퓨터랜드 상점 점장이 리처드 개리엇 몰래 소프트웨어 유통업체인 '캘리포니아 퍼시픽 컴퓨터(California Pacific Computer)' 관계자에게 게임을 유통해달라면서 소포로 보낸다. 게임을 받아본 캘리포니아 퍼시픽 관계자들은 그 게임의 가치를 알았고, 바로 리처드 개리엇에게 전화를 걸어서 일체의 여행 경비를 지불할 테니 본사인 캘리포니아로 와서 계약을 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처음에 그는 그 전화가 의심스러웠다. 거액의 돈을 주고서 자기 게임을 계약하자고 하니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직접 공항에 마중 나와서 리처드 개리엇을 접대했을 뿐만 아니라, 고급 차를 렌트까지 해주었으며 고급 호텔로 리처드 개리엇을 안내했다. 국빈 부럽지 않은 대우를 받은 그는 바로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그리고 '알카라베스(Akalabeth)'는 캘리포니아 퍼시픽 관계자가 예상한 대로 많은 수익을 거두었다. 그는 게임 카피 하나당 5달러를 받기로 하였는데, 게임이 3만 개나 판매됨에 따라서 15만 달러의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이 돈은 리처드 개리엇이 대학 4년 동안 학비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오리진 시스템즈 창업과 울티마의 시대

텍사스 대학에 들어간 그는 다시 학교생활을 열심히 하였다. 그는 두 개의 서클에 가입하는데, 하나는 펜싱 동아리였고 다른 하나는 '창조적 시대착오주의(Society for Creative Anachronism)'로 불리는 동아리였다. 창조적 시대착오주의 클럽은 각종 보드 게임과 판타지 소설에 관해서 토론하고 연구하면서 여러 가지 창조적인 예술 활동을 하는 곳이었다. 중세 시대 복장으로 코스튬 플레이(costume play, 유명 캐릭터를 흉내 내는 행위)를 하면서 이벤트를 여는 등 꽤 유명한 학교 클럽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켄 아놀드(Ken Arnold)나 데이비드 왓슨(David Watson)처럼 차후에 울티마 프로젝트에 같이 일하는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차츰 대학 생활에 익숙해지자 그는 다시 게임 프로젝트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틈틈이 대학 생활을 하면서 그는 '울티마 I(Ultima I: The First Age of Darkness)'과 '울티마 II(Ultima II: The Revenge of the Enchantress)'를 연속적으로 발매한다. 역시 시장에서의 반응은 좋았다. 하지만 그는 분명 이때까지만 해도 그것이 직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취미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리처드 개리엇은 두 가지 사건을 겪으면서 본격적으로 게임 사업을 결심하게 된다. 첫째는 컴퓨터 프로그래밍 과목에서 F 학점을 맞게 되는 사건이다. 세계 최초로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을 개발한 그가 F 학점을 맞게 되자, 그는 도저히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집에서는 아주 잘 실행되었던 프로그램이 정작 학교에서는 실행되지 않았던 것이다. 프로그래밍에 자신이 있었던 그에게는 아주 기분 나쁜 일이었고, 그는 더 이상 학교를 다니고 싶지 않다는 생각까지 가지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울티마 II'의 유통을 맡았던 '시에라 온라인(Sierra On-Line)'과의 불화는 리처드 개리엇이 학교를 중퇴하는 데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시에라 온라인이 게임 판매 이익금을 제대로 주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 그는 자기 회사를 직접 차릴 결심을 한 것이다. 결국 그는 가족에게 대학을 그만둘 것이라고 폭탄선언을 한다.

가족들이 모두 반대할 것이라는 생각과는 다르게, 의외로 그의 가족들은 모두 일제히 호응을 해준다. 그런 반응에 리처드 개리엇은 조금 놀랐다. 하지만 가족들은 그가 그냥 일시적으로 한번 호기심에 사업을 해보는 것이라 생각했다. 젊은 시절에 사업 경험을 가진다는 차원에서 그의 회사 창업을 반겼을 뿐이었다. 그리고 결국 언젠가는 대학으로 돌아가서 진짜 직업을 가지리라고 봤던 것이다. 게다가 리처드 개리엇이 게임을 팔아서 부수입을 짭짤하게 거두는 것을 직접 지켜본 가족들은 그가 큰 손해를 입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리처드 개리엇은 마침 MIT에서 경영학 석사(MBA)를 공부하고 있던 형 로버트 개리엇의 도움을 받아서 '오리진 시스템즈(Origin Systems)'를 창업한다. 이 때문에 개발은 리처드 개리엇이 머무는 텍사스주의 휴스턴에서 진행하고, 재정과 홍보 같은 회사의 기타 업무는 매사추세츠주에서 로버트 개리엇이 처리했다. 로버트 개리엇은 나중에 석사 학위를 받고 리처드 개리엇과 함께 텍사스 오스틴에서 합류한다. 오리진 시스템즈의 '울티마 III(Ultima III: Exodus)'는 보다 강력해진 그래픽에 파티 시스템을 첨가하였다. 시장에 발매된 '울티마 III'는 역시 롤플레잉 게임의 개척자라는 평가를 받으며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둔다. 어느덧 리처드 개리엇이나 그의 집안에서도 이제 게임 개발은 취미나 장난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바친 가업이 되어 있었다.

철학을 담은 게임, 울티마 IV

그리고 그는 이때 게임 시리즈 역사상 최고로 평가받는 대망의 '울티마 IV(Ultima IV: Quest of the Avatar)'를 개발하면서 세계 게임사를 다시 새로 쓴다. 사실 기존의 울티마는 그냥 이름만 같았던 게임이었고 게임 간의 연관성이 적었다. 세계관도 어설펐고 스토리도 악을 쓰러뜨려야 한다는 정도로 단순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게임을 개발하면서 얻은 모든 경험과 지식을 쏟아부어서 4탄을 발매하였고, 게임 시리즈 전체 역사상 최고의 역작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그는 이 게임을 만들고 나서 울티마 게임을 만드는 것에 흥미를 잃었다고 할 정도로 정말 모든 것을 쏟아부었고, 자신이 생각한 모든 것을 구현해냈다.




'울티마 IV'의 특징은 철학과 윤리로 대표된다. 이른바 명성 시스템(Virtue System)을 도입해서 플레이어가 얼마나 도덕적인 상태에서 게임을 진행하는지가 게임 내용에 반영되었던 것이다. 이는 게임계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으며, 게임 세계관의 깊이가 철학적인 이슈까지 담고 있다면서 엄청난 극찬을 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울티마의 전성기는 5탄과 6탄까지 계속되면서 매해 최고의 게임으로 등극하더니, 어느덧 울티마 시리즈는 롤플레잉 게임 중에서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MMORPG 시대를 연 울티마 온라인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오리진 시스템즈가 균열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울티마 VII(Ultima VII: The Black Gate)' 때였다. '울티마 VII'은 사상 최대의 제작비가 들어가는 거대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울티마 VII'은 버그(게임상의 오류로 화면이 멈추거나 게임 진행이 되지 않는 현상) 문제 때문에 계속해서 발매가 연기되었다. 이로 인해서 회사의 자금 사정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오직 '울티마 VII'만이 성공하기를 기원하면서 회사의 모든 자금을 쏟아부었고, 겨우 출시는 될 수가 있었다. 하지만 게임을 실제 구입해서 플레이한 유저들은 수많은 버그와 오류 속에서 치를 떨어야 했다. 제대로 버그 테스트를 하지 않고 성급하게 게임을 내놓은 결과였다. 이는 회사에 치명타를 가했다. 소비자들의 항의는 계속되었고 게임 판매는 저조했다. 결국 이로 인해서 오리진 시스템즈는 더 이상 회사를 운영하기 힘들어지는 상황에 이르고야 만다.


하지만 이때 세계 최대 규모의 게임 유통업체인 '일렉트로닉 아츠(Electronic Arts, EA)'가 오리진 시스템즈에 인수를 제의한다. 정확한 액수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리처드 개리엇은 주식을 넘기는 대가로 수백만 달러의 금액을 받는다. EA의 인수로 오리진 시스템즈는 다시 자금에 여유가 생겼다. 이 덕분에 오리진 시스템즈는 '울티마 VIII(Ultima VIII: Pagan)'의 개발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94년도에 발매된 '울티마 VIII'은 유감스럽게도 롤플레잉 게임이 아니라 액션 게임에 가까웠다. (주: 원문 98년은 오기인 듯하여 발매년도 94년으로 수정) 기존에 머리를 쓰고 스토리를 음미하던 게임이 아니라, 슈퍼 마리오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장애물을 피하는 게임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울티마 VIII'로 인해서 그동안 울티마 시리즈가 쌓아 놓은 명성이 일거에 무너졌다는 위기감이 회사에 팽배해졌다.

이때 마침 회사에서는 '울티마 온라인(Ultima Online)'을 진행 중이었다. 정식 작업은 아니었고, 단지 실험적인 차원에서 운영하던 프로젝트였다. 세계 최초의 혁신적인 게임을 지향하는 오리진 시스템즈는 언젠가는 온라인 게임이 주류가 될 것이라는 예상으로 테스트 성격의 팀을 가동 중이었던 것이다. 처음 울티마 온라인팀은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둠(Doom)'과 같은 3D 게임으로 제작 중이었다. 하지만 번번이 기술적인 실패를 하면서 좌절하고 있었다. 그래서 욕심을 조금 줄이고 과거의 게임인 '울티마 VI(Ultima VI: The False Prophet)'의 엔진을 기초로 해서 다시 울티마 온라인을 개발하자, 게임의 재미도 있으면서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었다. 게임 기술이 확보되자 회사에서는 울티마 온라인 게임의 시장성을 예측하고 게임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진행하기로 하였다.

이때 리처드 개리엇도 울티마 온라인팀에 합류해서 게임 개발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1997년도에 울티마 온라인의 상용 서비스를 실시하고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된다.

EA와의 만남과 결별

하지만 이러한 성공으로 인해서 리처드 개리엇과 EA 사이에는 앙금이 쌓이게 된다. 사실 울티마 온라인을 개발할 때만 해도 EA 측에서는 기존에 성공 모델이 없다면서 반대를 하였다. 그가 울티마 온라인팀에 합류하려 하자, 돈도 안 되는 온라인팀에 끼지 말고 '울티마 IX(Ultima IX: Ascension)'나 만들라고 하였다. 그랬던 사람들이 울티마 온라인이 성공하자 태도가 싹 달라졌다. 리처드 개리엇과는 아무런 합의도 하지 않고서 EA 독단으로 '울티마 온라인 3D'에서부터 '울티마 온라인 2', '해리 포터 온라인', '윙 커맨더 온라인' 제작 계획을 전 세계에 발표한 것이다. 온라인 게임이 성공하겠느냐며 비아냥거렸던 그들이, 이제 오리진 시스템즈가 세계 최고의 온라인 게임 회사라면서 회사 운영 계획을 마음대로 짰던 것이다.

이런 문제로 EA와 그의 사이는 급속도로 나빠졌다. 이때 마침 '울티마 IX'가 발매되었고, 유감스럽게도 시장에서 저조한 판매 기록을 남겼다. EA는 이때다 싶었던지 희생양으로 리처드 개리엇을 지목하고 사퇴 압력을 넣는다. 결국 그는 그의 분신과도 같은 오리진 시스템즈를 2000년도에 떠나고 만다. 사실상 쫓겨난 거나 다름없었다. 1년 이상 동종 업계에서 근무할 수 없다는 계약 조항으로 인해서 그는 이때 잠정적인 휴식을 선언하고 세계의 오지를 탐험한다.




세상을 창조하는 크리에이터

리처드 개리엇이 생각하는 게임이란, "우리는 세상을 창조한다"고 외쳤던 오리진의 모토 속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그가 항상 강조하는 '세상을 창조한다'는 의미는 톨킨이 '반지의 제왕'을 쓰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톨킨은 단순히 스토리만 쓴 것이 아니라, 판타지라는 하나의 세상을 창조하였다. '반지의 제왕' 속에서 살아가는 종족들은 모두 그들만의 전설과 역사가 있다. 또한 그 속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문화와 관습이 있는데, 이 모든 것을 톨킨이 창조해내었다. 그 역시 톨킨처럼 울티마를 통해서 그의 세상을 창조하려 하였다.

그리고 리처드 개리엇은 그가 창조한 세상을 단순히 게임이라는 가상 세계 속에만 머물러 있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게임 속에서 만들어 놓은 것들을 현실에서도 재현하려는 노력을 많이 한다. 단지 화려한 게임 쇼에서 게임을 홍보하기 위한 쇼맨십이라고 보기에는, 그가 사는 방식은 확실히 다르다.

우선 그의 집을 보면 울티마에 등장하는 중세 스타일의 성이다. 텍사스에서도 명물로 꼽히는 이 집에서는 매년 핼러윈 파티 때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게임 팬들이 각자 코스튬 플레이(유명 인사나 캐릭터들과 똑같이 분장하는 것)를 해서 화려한 파티를 연다. 그리고 겉모습은 성으로 되어 있는 그의 집 내부는 각종 장애물과 미로로 이루어진 던전이 있다. 여기서 초대된 손님들은 던전의 장애물을 빨리 빠져나오는 대회를 열기도 한다. 나중에는 사람들이 이 던전을 쉽게 빠져나오자, 전체 던전의 크기를 넓히기 위해서 집 전체를 새로 짓기도 하였다.

그는 크리에이터가 게임과 실제 생활이 하나가 되어 게임을 만들어야, 많은 게임 유저들이 현실감을 느끼는 그런 게임을 개발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래서 그는 모험이 영원한 테마인 롤플레잉 게임 크리에이터답게 세계 오지를 돌아다니며 탐험을 즐긴다. 이미 보통의 민간인으로는 가기 힘들다는 남극에도 두 번이나 다녀왔으며, 타이타닉호가 침몰한 곳을 탐험하다가 과거에 침몰했던 다른 배를 찾아낼 정도로 모험에 적극적이다. 이제는 지구 내에서의 모험은 지겨웠는지, 그는 몸소 우주여행을 하기 위해서 러시아의 항공우주국에서 우주 비행사 훈련을 받기도 했다. (실제로 2008년 국제우주정거장(ISS) 방문)

결국 그가 생각하는 게임이란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현실과 게임이 동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가 실제 생활에서 보여주듯이, 게임 속의 세상을 현실에서도 재현하고 체험해보려는 노력이 게임의 아이디어가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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