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어를 사로잡는 마법, 게임 세계관: 유형 분석부터 창조 신화까지

게임 기획 개론 : 시나리오편(15)



현대

게임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세계관은 바로 우리가 사는 현재를 바탕으로 한다. 레이싱 게임은 배경인 현대를 얼마나 제대로 구현하느냐가 게임의 성패를 좌우할 정도로 현실을 그대로 표현하려 노력한다. 스포츠 게임은 물론, GTA, 스프린터 셀, 레인보우 식스, 쉔무, 심즈 등도 현실을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스토리가 중요한 게임은 현재 세상을 그대로 반영하기보다 조금 변형된 세계관을 창조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로 '메탈기어 솔리드' 시리즈가 있다. '메탈기어 솔리드'는 기본적으로 1990년대 세계를 배경으로 하지만, 과학적으로 훨씬 발전된 세상으로 설정하여 더 다양한 무기와 아이템을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처럼 현재 배경에 강력한 슈퍼히어로와 적을 등장시키듯, 게임 스토리텔링을 위해서는 현재 세계관에 '플러스 알파'의 요소를 가미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역사적 사건의 현장 속으로

유저를 역사적 사건의 현장으로 끌어들여 흥미를 유발하는 게임도 많다. 대표적인 예가 '문명'이다. '문명'은 이름처럼 세계사 속 문명이 급속도로 발전했던 그리스나 로마 등의 역사를 직접 경험하게 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 '문명'은 한국, 일본, 중국 등 다양한 문화도 체험하게 했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역시 세계 각국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또한 많은 게임에 등장하며, '메달 오브 아너'나 '콜 오브 듀티'의 주요 소재가 되었다. 중국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삼국지'와 '진삼국무쌍', 일본 전국시대를 그린 '전국무쌍'과 '귀무자' 등도 높은 인기를 누렸다. 한국에서는 '바람의 나라'가 고구려를 배경으로 하여 화제를 모았다. 역사책에서나 볼 수 있는 과거 세계는 게임에서 좋은 소재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역사를 배경으로 할 경우, 유저들은 고증에 대해 엄격하고 철저하기를 기대한다. 따라서 역사를 배경으로 한 게임을 제작할 때는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접근해야 한다. 외국에서는 단순히 문헌 자료에 만족하지 않고 직접 유적지를 방문하여 고증할 정도로 철저하기도 하다. 직접 유적지를 방문하지 못하더라도, 역사를 소재로 한다면 전문가 수준으로 연구하고 파고들어야 한다.

판타지

판타지는 롤플레잉 게임(RPG)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사람들은 RPG 하면 으레 판타지 세계를 떠올린다. 우리나라 게임계를 장악한 '리니지' 시리즈, 일본의 국민 게임 '드래곤 퀘스트', 그리고 미국의 대표 게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가 바로 이 판타지를 배경으로 한다. 많은 사람이 판타지 하면 '반지의 제왕'을 떠올리지만, 실질적으로 게임에 영향을 준 작품은 '던전 앤 드래곤스(Dungeons & Dragons)'이다. 이른바 테이블 위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하는 게임이라 하여 붙여진 TRPG(Table Talk Role Playing Game)의 원조인 '던전 앤 드래곤스'는 RPG 방식뿐 아니라 설정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반지의 제왕'에서 글로 묘사하고 넘어갔던 종족들의 특징을 '던전 앤 드래곤스'는 게임의 관점에서 완벽하게 재창조했다. 게임 세계는 사실 수치에 의해 움직이는 매트릭스와 같은 세상이다. 유저가 적을 공격하면 적의 체력 수치가 줄고, 적의 공격을 받으면 유저의 체력 수치가 줄면서 전투가 벌어진다. '던전 앤 드래곤스'는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종족, 캐릭터, 아이템에 이런 수치를 부여했다. '팰러딘'이나 '마법사' 같은 직업 체계도 '던전 앤 드래곤스'가 정립한 개념이다. 또한 '던전 앤 드래곤스'는 단순히 '반지의 제왕' 외에도 더 많은 역사, 지역, 종족, 캐릭터, 아이템 등을 추가했다. 한국 판타지 소설의 새로운 장을 연 '드래곤 라자'의 경우만 해도 '반지의 제왕'보다 '던전 앤 드래곤스'에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 물론 '반지의 제왕'이 단단한 초석을 마련했기에 그 위에 '던전 앤 드래곤스'의 세계가 만들어졌지만, 현재 소설이나 게임을 만드는 사람들은 '던전 앤 드래곤스'를 더욱 많이 참고한다. '던전 앤 드래곤스'의 설정은 정통 RPG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작용하므로, 판타지 배경의 RPG 개발자는 그 내용을 숙지하고 게임에 응용할 줄 알아야 한다.

우주 SF

우주 SF의 역사는 미국과 소련이 우주선 개발 경쟁을 벌였던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8년 소련이 무인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 발사에 성공하자, 미국은 이에 자극받아 1960년 케네디 대통령 취임과 함께 본격적인 우주 탐사 계획을 세웠다. 1961년 소련은 유인 우주선 발사에 성공하며 전 세계를 다시 한번 놀라게 했다. 당시 소련과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우주에 대한 호기심이 극에 달했으며, 소설에서도 우주는 단골 소재였다. 우주 SF 소설에 심취했던 젊은이 중 한 명이 바로 세계 최초의 비디오 게임으로 평가받는 '스페이스워!(Spacewar!)'를 개발한 스티브 러셀이다. 이처럼 우주는 게임의 시작부터 함께했을 만큼 게임의 단골 소재이기도 하다. 우주가 주는 새롭고 미래적인 느낌이 컴퓨터 게임의 이미지와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1966년부터 미국에서 방영된 '스타트렉(Star Trek)'은 사회적 현상이라 불릴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이는 우주라는 세계관이 얼마나 매력적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세계 최초의 마이크로컴퓨터로 불리는 알테어 8800(Altair 8800)의 이름이 '스타트렉'에서 엔터프라이즈호의 목적지 중 하나인 알타이르 항성계에서 유래했다는 점은 컴퓨터 애호가들에게 우주가 특별한 의미를 지님을 보여준다.

1968년에 개봉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우주 SF의 새로운 시대를 연 걸작으로 인정받으며 많은 사람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스타워즈'의 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조지 루카스다. 조지 루카스는 우주를 배경으로 고대 신화를 접목하겠다는 생각으로 '스타워즈'를 탄생시켰다. '스타워즈'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은 미국의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의 저서들이다. 조지프 캠벨은 전 세계 신화를 연구하며 공통점을 발견하고 이를 패턴에 따라 분류·정리하여 책으로 발표했는데, 조지 루카스는 이 연구 결과를 참고하여 '스타워즈' 시나리오를 집필했다. 이외에도 '스타워즈'는 '반지의 제왕' 속 마법사 간달프와 호빗 프로도의 스승과 제자 관계를 참고하여 제다이 기사 오비완 케노비와 주인공 루크 스카이워커를 창조했다. 또한 검을 사용하는 전투 장면은 일본 사무라이 영화들을 많이 참고했다. 서부 시대를 배경으로 한 활극들도 '스타워즈' 세계관 속에 녹아들어 있다. '스타워즈'는 다양한 라이선스를 통해 라디오 드라마, 소설, 만화, 게임으로 재탄생했다. '스타워즈'는 원 소스 멀티 유즈(OSMU)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손꼽히며, 특히 게임에서는 '스타워즈'라는 이름만 붙으면 판매 1위는 따 놓은 당상일 정도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우주를 배경으로 한 또 다른 성공작은 '헤일로' 시리즈다. '헤일로' 시리즈는 단 두 편만으로 천만 장이 넘는 판매고를 기록하며 '포스트 스타워즈'라는 별칭을 얻었고, 미국에서는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여겨질 정도다. RPG 하면 일반적으로 판타지를 떠올리지만, FPS 하면 우주 SF를 떠올릴 정도로 찰떡궁합을 이룬다. 물론 '헤일로'도 우주 SF이지만, 세계 최고의 3D FPS로 불리는 '둠'과 '퀘이크'도 우주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세계 최고의 3D 엔진이라는 칭호를 듣고 200만 장이 넘는 판매고를 기록한 '언리얼' 시리즈와 XBOX360으로 높은 인기를 얻은 '기어스 오브 워' 역시 우주가 배경이다. FPS 게임과 우주 SF의 궁합이 좋은 이유는 최첨단 무기를 다양하게 선보이고, 기괴한 외계 생명체를 표현하기 용이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무협

사실 무협이라는 세계를 김용 혼자서 창조한 것은 아니다. '삼국지연의'나 '서유기' 같은 중국 고대 소설뿐 아니라 이미 많은 무협 이야기가 설화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김용은 무협소설의 이미지를 대중에게 확실히 각인시키며 수많은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무엇보다 중국의 역사와 소설을 교묘하게 접목함으로써 무협소설에 대한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미 무협지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김용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협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철학 설정들은 이제 김용 소설을 기준으로 삼지 않으면 오히려 정통에서 벗어났다는 비판을 받을 정도다. 그래서 무협을 세계관으로 하여 게임을 만들려면 김용 소설을 반드시 읽으며 기초 교양을 쌓아야 한다. 무협 배경의 게임들이 최고 수준의 인기를 얻지는 못하더라도, 기본 이상의 꾸준한 수익을 내는 소재로 알려져 있다. 무협 세계를 바탕으로 한 대표적인 게임으로는 '미르의 전설 2', '열혈강호 온라인', '영웅 온라인' 등이 있다. 특히 무협 게임은 중국에서 환영받는 소재 중 하나이므로 수출을 고려한다면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 '미르의 전설 2'는 중국 게임 업체 샨다(盛大)에서 수입했는데, 샨다의 회장은 이 게임의 성공 덕분에 중국 최고 부자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참고로 한때 중국에서는 김용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김용군협전 온라인'이 큰 인기를 얻었고, 김용 소설들은 대부분 패키지 게임으로 출시되어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다. 그런데 무협 게임은 판타지 배경 작품에 비해 참고 자료가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판타지의 경우 '던전 앤 드래곤스' 덕분에 풍부한 자료와 설정이 쌓여 있다. 하지만 무협소설은 다양한 무술이 등장하는 반면, 적의 모습이나 무기, 아이템 설정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편이다. 그리고 무협지의 무술에 판타지 속 몬스터를 등장시키는 게임도 있지만, 막상 화면으로 보면 어색한 경우가 있다. 유저들이 다양한 몬스터 대신 인간형 적들만 반복해서 상대하다 보면 쉽게 게임에 싫증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 무협은 마법이나 무기 등도 판타지의 다양성에 비하면 부족한 감이 있다. 그러므로 무협 배경의 게임을 개발할 때는 유저들이 지루함을 느끼지 않도록 다양한 아이템, 몬스터, 기술 등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사이버펑크

사이버펑크(Cyberpunk)는 윌리엄 깁슨의 소설 '뉴로맨서'를 모태로 탄생한 세계관이다. 사이버(cyber)는 컴퓨터를, 펑크(punk)는 반항적인 젊은이를 의미하며, 이는 최첨단 컴퓨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해커의 이미지와 유사하다. 소설 '뉴로맨서'는 최첨단 기술로 무장한 미래 세계를 배경으로 반항적인 젊은이들의 활약을 그리는데, 1984년 발표 이후 높은 인기를 얻으며 인류의 발전된 미래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 사이버펑크 계열로 분류되기 시작했다.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큰 인기를 끈 '공각기동대'나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영화 '매트릭스' 등이 대표적인 사이버펑크 작품으로 꼽힌다. 사이버펑크 계열의 대표적인 게임으로는 소설을 바탕으로 개발된 '뉴로맨서'와 코지마 히데오 감독의 '스내처' 역시 사이버펑크 계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이버펑크는 컴퓨터와 밀접한 세계관임에도 불구하고, 컴퓨터 게임에서는 그다지 인기 있는 소재가 아니다. 사이버펑크는 고도로 발전된 문명이 결국 인류에게 불행을 가져다주었다는 어두운 분위기에서 출발하는 단점이 있다. 그리고 게임에서는 적과의 전투가 중요한데, 사이버펑크의 경우 인간이나 로봇 정도로 몬스터가 한정되어 판타지의 다양한 종족이나 우주 SF의 외계 생명체에 비해 매력이 떨어진다. 또한 사이버펑크는 게임 내에서 통일감을 주기 어렵다. 인류는 분명 발전했는데 사람들의 복장은 그대로인 것처럼 어색한 경우가 많다. 과거 '울티마' 시리즈 중 하나가 사이버펑크 계열로 개발되다가 취소된 전례가 있다. 당시 스크린샷까지 공개했지만, 화면 속 인물과 배경 간의 부자연스러움이 가장 많은 지적을 받았다. 사이버펑크를 배경으로 게임을 개발할 경우, 발전된 기계 문명과 인간의 실제 생활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크로스오버

크로스오버는 두 개 이상의 세계관을 하나의 게임에 접목한 경우를 말한다. 판타지와 첨단 과학 기술이 공존하는 '파이널 판타지 VII'과 '파이널 판타지 VIII'이 대표적인 크로스오버 게임이다. 1990년대 현대에 외계인이 침공하는 '하프라이프'나 제2차 세계 대전에 외계인이 침공하는 '레지스탕스' 역시 역사와 우주 SF 세계관이 접목된 예다. 최근 한국에서는 판타지와 무협을 결합한 작품을 선보이기도 한다. 유저 캐릭터는 무협인데 몬스터는 판타지인 식이다. 그러나 크로스오버 역시 게임 세계관에서 항상 환영받는 소재는 아니다. 여러 세계관이 섞이면서 게임 전체의 통일성과 조화를 이루기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사이버펑크를 게임 유저들이 외면한다면, 크로스오버는 게임 개발자들이 먼저 피하는 경향이 있다. 여러 세계가 뒤섞인 가운데 모순 없는 규칙과 질서를 만들기 위해 작가는 두 배, 세 배 이상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판타지와 무협을 배경으로 게임을 만든다고 가정해 보자. 우선 판타지와 무협 각각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그리고 둘을 하나의 게임에 접목하기 위해서는 또다시 많은 실험 과정을 거치며 조율해야 한다. 현재 많은 작가가 과거의 톨킨처럼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세계관을 구성하기 어려워지면서, 그 돌파구로 크로스오버를 대안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실제로 증기기관, 중세 서양, 그리고 현재의 모습을 혼합하여 '미래소년 코난'이라는 크로스오버 형태의 세계관을 창조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최고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크로스오버라고 해서 단순히 여러 세계관의 장점만 가져와 결합하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은 실패로 이어지기 쉽다. '파이널 판타지 VII'의 경우, 스토리 자체는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마법과 과학의 공존에 대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부분이 많았다. 인간의 상상이 빚어낸 마법과 눈으로 확인되는 과학이 양립하다 보니, 그 자체가 여러 부분에서 논리적 허점을 안고 시작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크로스오버는 두 개의 세계를 하나의 게임에서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 매력적이다. 하지만 게임 내에서 조화와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게임 작가뿐 아니라 게임 개발자 전체가 두 배, 아니 그 이상의 노력을 기울여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창조 신화와 역사

앞서 제시한 세계관 중 하나를 선택했다면, 다음은 그 세계의 역사를 만드는 작업이다. 게임 속 가상 공간을 더 깊이 있고 현실감 있게 만들기 위한 방법 중 하나는 주인공이 활약하는 시대뿐 아니라 그 이전의 역사까지 창조하는 것이다. 물론 거창한 창조의 역사를 쓸 수도 있고, 전혀 필요 없을 수도 있다. 이는 게임 장르에 따라 다르다. 하지만 RPG가 아니더라도 스토리가 있는 게임이라면 최소한 연표 정도는 정리하는 것이 좋다. 이런 점에서 액션 게임인 '하프라이프'와 '바이오하자드'는 연대에 따라 발생한 사건이 잘 정리되어 있다. 게임에서 역사가 필요한 이유는 게임 스토리 구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다음 장에서 게임 스토리텔링에 대해 자세히 서술하겠지만) 게임 시나리오는 수수께끼가 또 다른 수수께끼를 불러일으키는 구조를 가져야 효과적이다. 이런 수수께끼식 구성을 위해서는 과거의 사건과 현재 상황을 치밀하게 연결하는 것이 가장 좋다. 과거 미궁에 빠졌던 사건을 하나씩 풀어가면서 유저의 궁금증과 호기심을 자극하고 해소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성을 잘 활용한 것이 바로 '메탈기어 솔리드'이다. '메탈기어 솔리드'에서 주인공인 첩보원 스네이크는 작전 중 여러 사건을 겪게 되는데, 이것이 과거의 사건들과 연결되면서 흥미로운 이야기 구조를 갖게 되었다. 스네이크 주변 인물들은 과거에 모두 한 번씩 인연이 있었고, 이러한 관계들이 현재의 사건에 영향을 주면서 극의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이는 '메탈기어 솔리드'가 시작되기 이전의 사건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구성이었다.

액션 게임은 과거 사건을 연대표 수준으로 정리하면 되지만, RPG는 좀 더 근원적인 부분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RPG의 경우 우주 창조의 시기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면 게임 안의 세상이 더욱 생명력 있게 다가온다. 하지만 창조 시대부터 세계관을 설정하는 것이 필수는 아니다. 대부분의 게임은 창조와 변화의 역사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런데 창조와 변화의 역사가 게임 스토리와 맞물리게 되면 큰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디아블로'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이다. '디아블로'는 초기 스토리에 대한 비판을 많이 받았지만, 창조의 역사와 악의 기원을 밝힌 세계관 설정을 읽은 유저들은 블리자드의 노력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MMORPG의 새로운 지평을 연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는 창조 역사부터 세상의 변화 과정을 자세히 다룬다. 물론 게임을 진행하는 데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역사를 몰라도 된다. 하지만 그 방대한 역사를 읽고 나면 게임의 깊이를 새삼 절감하게 되고, 개발팀의 노력과 성의에 감탄하며 게임에 대한 충성도가 높아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평범한 모자라도 마이클 잭슨이 콘서트에서 썼다는 '역사'가 부여되면 그 가치가 급상승하듯, 가상 공간에 역사를 부여하면 게임의 가치는 한층 높아진다.

그런데 게임에서 창세기를 이야기할 때는 완전한 무(無)의 상태에서부터 묘사하지는 않는다. 대부분 성경처럼 '태초에 신이 있었다'는 전제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물론 '리니지 2'는 빅뱅 이론에 근거해 창조론을 펼치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창세기는 신들이 세상의 질서를 만드는 과정을 서술하면서 시작한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는 우주 창조 자체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두고, 신들이 질서를 만드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디아블로' 역시 태초부터 신과 악, 빛과 어둠이 이미 충돌하고 있었다면서 창조의 역사를 묘사한다.

결국 창조 신화와 역사의 첫 단계는 세상의 외형이 만들어지는 물리적 과정보다는, 이미 존재하는 세상 위에 질서나 규칙처럼 보이지 않는 가치가 세워지는 과정을 다루는 경우가 많다. '젤다의 전설'에서는 처음 우주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없지만, 혼돈의 상태에서 힘의 여신 딘, 지혜의 여신 넬, 용기의 여신 파로가 세상에 질서와 법을 부여하고 생명을 창조하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신과 우주는 태초부터 존재했으며, 이제 그 우주를 다스리는 법과 생명들을 창조하는 과정이 바로 창세기의 내용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는 이 과정을 '티탄'이라 불리는 신들을 통해 묘사한다. 티탄들은 드워프나 드래곤 같은 생명체를 만들고 그들에게 권능을 주면서 마법의 힘을 부여하기도 했다. 이렇게 태초에 신들이 존재했고, 그들이 세상을 평화롭게 창조하는 과정이 창세기 1장에 해당한다면, 2장에서는 악의 탄생을 다루게 된다. 그런데 '디아블로'에서는 악의 탄생을 최초부터 제시하기도 한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도 악의 세력이 이미 존재했던 것으로 시작한다. 처음부터 선과 악의 싸움이 있었다는 전제 아래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이렇게 악의 존재를 처음부터 밝히고 시작하기도 하지만, 악의 탄생 과정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게임도 많이 있다.

악의 기원을 밝히는 방식은 대략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창조신 중 하나가 탐욕 등으로 인해 변심하여 악이 되는 경우다. '반지의 제왕' 이전 시대를 다룬 '실마릴리온'에서 절대자 에루가 창조한 아이누 중 하나인 모르고스가 변절하여 악을 탄생시킨 것이 좋은 예다. 둘째, 실수로 악이 창조되는 경우로, '이스' 시리즈가 여기에 해당할 수 있다. 이 경우 신의 실수보다는 신을 따르는 종족들의 실수인 경우가 더 많다. '이스' 세계는 두 여신에 의해 창조되었고, 여신의 선택을 받은 여섯 신관(하달, 토바, 다비, 메사, 젬마, 팩트)이 세상의 풍요를 위해 여러 가지를 만들었는데, 그중 하나인 '크레리아'라는 금속 물질이 의도치 않은 부작용으로 악을 탄생시켰다는 설정이다.

악이 세상에 탄생하면 우선 신들의 능력으로 봉인되는 과정을 거친다. 하지만 후세에 봉인되었던 악이 다시 풀려나면서 새로운 전쟁이 시작된다. 바로 이때 악을 잠재우기 위해 주인공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창세기부터 역사를 설정한 게임들은 여기서 시대를 한 번 더 구분하며 '영웅의 활약상'이라는 이야기를 추가한다. 이는 (1) 절대신의 우주 창조, (2) 하위 신들의 생명 창조에 이어 (3) 인간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장치다. 이제 신화의 시대에서 전설의 시대로 넘어왔음을 알리기 위해 인간 영웅이 등장하는 것이다.

영웅의 이야기는 다시 두 갈래로 나뉜다. 우선 영웅은 악을 쓰러뜨린 후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신화가 아닌 전설을 이룬다. 나중에 다시 악의 세력이 몰려오면 영웅이 사용했던 무기와 아이템들은 악마들과 대결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된다. 이러한 세계관을 기초로 한 '드래곤 퀘스트'에서는 악이 부활하자 주인공은 과거 영웅들이 사용했던 로토의 검과 방패를 찾아 모험을 시작하고, 영웅의 무기로 악을 물리친다. 반대로, 악을 물리친 영웅이 자신도 모르게 악의 기운에 이끌려 악의 화신이 되는 경우도 있다. '디아블로 1'의 주인공이 바로 그렇다. 악이 부활한 '디아블로 1'의 세상에서 활약했던 주인공은 최종 보스인 디아블로를 쓰러뜨려 영웅이 되지만, 결국 디아블로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그의 몸은 디아블로의 숙주가 되고 만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는 한때 악을 물리쳤던 최고의 용사 살게라스가 타락하여 악의 화신으로 거듭나기도 한다.

액션 게임의 경우 연대표 수준의 역사가 사용되고, RPG에서는 우주 창조의 역사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러한 역사 창조 작업은 만들고 있는 게임의 종류나 기획 의도에 따라 진행할 수도, 안 할 수도 있으며 이는 순전히 선택 사항이다. 하지만 우주 창조의 역사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면 게임의 깊이와 사실감을 높이고, 스토리텔링 과정에서도 참고할 수 있는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다음 장에서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창세기부터 시작하는 세계관 설정은 크게 세 시대로 나눌 수 있다. 1세대는 절대신이 우주와 하위 신들을 창조하는 과정, 2세대는 하위 신들이 대륙을 만들고 각종 생명체를 창조하는 이야기, 3세대는 악을 물리치는 인간 영웅의 이야기를 다룬다. 1, 2세대는 '신화의 시대', 3세대는 '전설의 시대'로 구분하여 작성할 수 있다.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기획의 오해와 진실: 스티브 잡스는 어떻게 세상을 움직였나?

게임의 전설 윌 라이트(2): 좌절 끝에 피어난 '심즈' 혁명, 게임의 역사를 다시 쓰다

스티브잡스와 애플을 만든 실리콘밸리의 전통과 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