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의 전설 윌 라이트(2): 좌절 끝에 피어난 '심즈' 혁명, 게임의 역사를 다시 쓰다

 


성공 뒤의 위기: 맥시스의 상장과 하락세

<심시티> 시리즈는 그 이름만으로도 상품 가치를 지닌 맥시스의 핵심 IP(지식재산권)였고, 여러 차례 회사를 위기에서 구해냈다. <심시티 2000>의 성공 이후, 맥시스의 투자자들은 기업 공개(IPO)를 통한 주식 공모를 제안했다. 윌 라이트는 본래 기업 공개를 원하지 않았으나, 초기 투자 유치 시의 조건이었기에 이를 받아들여야 했다.

1995년, 맥시스는 나스닥에 상장하며 약 3,800만 달러의 기업 가치를 인정받았고, 직원 수 300명 규모의 중견 기업으로 성장했다. 불과 6년 전, 제프 브라운의 아파트에서 숙식하며 게임 개발에 몰두했던 시절을 생각하면 놀라운 변화였다.

그러나 기업 공개는 맥시스 하락세의 시작점이 되었다. 상장 이후 회사의 자유로운 개발 분위기는 점차 경직되었고, 투자자들의 잦은 간섭은 개발자들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1996년 한 해 동안 4개의 게임(<심콥터>, <심파크>, <심튠즈>, <풀 틸트! 핀볼>)을 완성해야 한다는 투자자들의 요구는 비현실적이었지만, 맥시스는 크리스마스 시즌 출시에 맞춰 개발을 강행했다.

결과는 실패였다. 촉박한 일정 속에 개발자들은 지쳤고, 출시된 게임들의 완성도는 낮았다. 특히 윌 라이트가 주도한 <심콥터>마저 수많은 버그로 혹평을 받으며 맥시스의 명성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 게임들은 시장에서 참패했고, 회사는 200만 달러의 적자를 기록하며 심각한 재정난에 봉착했다.

맥시스의 재기를 위한 유일한 희망은 <심시티> 시리즈의 부활이었다. 하지만 차기작을 3D가 아닌 2D 방식으로 개발한다는 계획이 알려지자, 3D 그래픽을 기대했던 유저들과 투자 분석가들로부터 실망과 비판이 쏟아졌다. 연이은 실패와 비난 속에 윌 라이트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거대 기업의 품으로: EA의 맥시스 인수

바로 그때, 미국 최대 게임 유통사 일렉트로닉 아츠(EA)로부터 인수 합병 제안이 들어왔다. 독자 생존이 어렵다고 판단한 맥시스는 EA의 제안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1997년, 맥시스는 1억 2,500만 달러에 EA에 인수되었고, 이 거래를 통해 윌 라이트는 1,500만 달러 상당의 주식을 확보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맥시스 직원 240명 중 약 40%가 해고되는 구조조정을 겪어야 했다.


'인형의 집'에서 시작된 새로운 도전: 심즈의 잉태

사실 윌 라이트는 <심시티 2000> 개발 이전인 1994년부터 '인형의 집(Dollhouse)'이라는 코드명의 새로운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었다. 이는 훗날 PC 게임 역사상 최고의 판매량을 기록하는 <심즈(The Sims)>의 시작이었다.

<심즈>의 초기 아이디어는 버클리 대학 건축학과 교수 크리스토퍼 알렉산더(Christopher Alexander)의 저서 『패턴 랭귀지(A Pattern Language)』에서 영감을 얻었다. 이 책은 건축 환경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253가지 패턴으로 설명했는데, 윌 라이트는 이 개념을 게임에 접목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심시티>가 도시 전체를 시뮬레이션했다면, <심즈>는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인생'을 시뮬레이션하는 게임이었다.

초기 구상 단계에서 윌 라이트는 게임의 핵심을 '건축'과 물리적 환경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에 두었다. 그러나 그의 어린 딸 캐시디가 "사람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집이나 물건이 아니라 가족"이라고 조언하자, 그는 게임의 핵심 콘셉트를 '인간관계'와 '삶의 본질'로 전환했다. 게임을 통해 인간관계, 시간 관리, 가족 간의 상호작용 등을 구현하고자 한 것이다. 플레이어가 <심즈> 속에서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삶을 직접 설계하고 경험하며 인생의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도록 게임을 디자인했다. 그는 플레이어가 게임 속 캐릭터('심')의 행복을 통해 성취감과 만족감을 느끼고, 궁극적으로 게임의 재미를 발견하리라 확신했다. 윌 라이트는 <심즈>가 <심시티>를 능가하는 상업적 성공과 게임계 파급력을 가질 것이라고 예견했다.

내부의 반대와 천재들의 만남

하지만 그의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당시 맥시스 내부에는 새로운 프로젝트의 개발 승인 여부를 결정하는 '포커스 그룹'이 존재했다. 주로 마케팅 담당자들로 구성된 이 그룹에 윌 라이트가 <심즈> 아이디어를 처음 공개하자, 반응은 냉담했다. 멤버 전원이 개발 반대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윌 라이트는 크게 실망했으나, 회사 내부 규정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설득했고, "프로젝트를 시작할 수 있도록 프로그래머 한 명만이라도 지원해 달라"고 간청했다. 기나긴 설득 끝에 그는 단 한 명의 프로그래머를 배정받을 수 있었다.

그 한 명의 프로그래머는 훗날 <심즈>의 수석 프로그래머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제이미 둔보스(Jamie Doornbos)였다. 스탠포드 대학 출신의 이 프로그래머는 윌 라이트가 구상하는 복잡한 시스템을 구현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윌 라이트와 제이미 둔보스는 단둘이서 약 1년 반 만에 실제 구동 가능한 <심즈> 프로토타입을 완성했다.

그러나 EA와의 합병 이후 <심즈> 프로젝트는 또다시 위기를 맞았다. EA는 이미 검증된 성공 공식을 바탕으로 게임을 대량 생산하는 시스템을 갖춘 회사였고, 성공 사례가 없는 <심즈> 같은 실험적인 게임 개발에는 회의적이었다. 기존 게임과 완전히 다른 <심즈>의 성공 가능성을 확신하지 못한 것이다.

이때 다시 한번 결정적인 인물이 등장했다. EA에서 맥시스의 책임자로 부임한 뤽 바르틀레(Luc Barthelet)였다. 그는 EA가 맥시스를 인수한 이유가 바로 <심즈>와 같은 혁신적인 아이디어 때문이라고 판단했고, EA 본사 경영진을 끈질기게 설득하여 마침내 <심즈> 프로젝트의 공식적인 진행 승인을 받아냈다.

이러한 과정들을 보면 윌 라이트는 중요한 순간마다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인물들을 만나는 운이 따랐다고 볼 수 있다. <심시티> 유통 문제로 고심할 때 제프 브라운을 만나 맥시스를 설립했고, <심즈> 개발이 막혔을 때 제이미 둔보스라는 프로그래머를 만났으며, EA 합병 이후 프로젝트가 좌초될 위기에서 뤽 바르틀레의 지원을 받았다. 특히 뤽 바르틀레는 경영자이자 뛰어난 프로그래머로서, 개발팀이 기술적 난관에 부딪힐 때 직접 코드를 수정하며 문제를 해결해주기도 했다. 그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4~5명에 불과했던 <심즈> 팀은 30여 명 규모로 확대되었고, 개발은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PC 게임 역사를 새로 쓴 불멸의 고전: 심즈

<심즈>는 윌 라이트가 직접 프로그래밍에 참여하지 않은 첫 번째 작품이었다. 그러나 게임 디자인 단계에서 이미 인공지능의 구체적인 로직과 상호작용을 상세하게 설계했기에, 사실상 문서상으로 프로그래밍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심즈>의 핵심 재미는 수많은 테스트를 통해 완성되었다. 게임 속 '심'들이 주변 환경 변화에 반응하고 상호작용하는 방식이 플레이어들이 납득 가능하면서도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절묘한 지점을 찾아내는 것이 관건이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윌 라이트의 독창적인 게임 기획 능력이 발휘되었다. 그의 섬세하고 깊이 있는 디자인 덕분에 <심즈>는 다른 게임 회사들이 쉽게 모방할 수 없는 독보적인 게임으로 완성될 수 있었다.

2000년 2월, '세계에서 가장 새롭고 독창적인 게임'이라는 평가와 함께 <심즈>는 EA를 통해 마침내 세상에 공개되었다. 결과는 예상을 뛰어넘는 성공이었다. <심즈>는 출시 이후 전 세계적으로 수천만 장(확장팩 포함 누적)이 판매되었고, 'PC 게임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게임'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인생 시뮬레이션'이라는 <심즈>의 독창성은 유저 커뮤니티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더욱 확장되었다. 플레이어는 자신이 육성한 고유한 '심' 캐릭터를 인터넷을 통해 다른 유저들과 공유할 수 있었다. 이 시스템 덕분에 유저들은 게임 콘텐츠를 스스로 확장하며 오랫동안 <심즈>의 세계를 즐길 수 있었다.

또한 <심즈>는 지속적으로 출시되는 '확장팩'을 통해 새로운 콘텐츠와 가능성을 끊임없이 제공했다. 이러한 확장팩 정책은 상업적이라는 비판도 받았지만, 유저들이 <심즈> 세계에 장기간 몰입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오늘날까지 <심즈>의 아성을 넘볼 만한 유사 게임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 게임의 독창성과 완성도를 증명한다. <심즈>가 특정 게임 장르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으나, 완전히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여 큰 성공을 거둔 사례로서 많은 게임 개발자들에게 창조성과 독창성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모델이 되었다.

윌 라이트의 게임 철학: 가족, 독서, 그리고 인내

윌 라이트의 삶과 게임 철학에는 그의 개인적인 경험과 가치관이 깊이 반영되어 있다. 특히 가족은 그에게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었다. 그의 부인 조엘 존스는 윌 라이트보다 12살 연상으로, 어린 시절 친구의 누나였다. 사고로 요양 차 고향에 온 조엘 존스와 방학을 맞아 귀향한 대학생 윌 라이트는 운명처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조엘 존스가 캘리포니아로 돌아가자, 윌 라이트는 사랑을 따라 대학을 중퇴하고 그녀에게 향했을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1984년 태어난 외동딸 캐시디 라이트는 부부에게 소중한 존재이자, 윌 라이트에게 게임 개발의 영감을 주는 동반자였다. 다섯 살 캐시디가 던진 날씨와 환경에 대한 질문은 훗날 <심어스(SimEarth)> 개발의 동기가 되었다. 특히 <심즈>에는 캐시디의 아이디어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앞서 언급했듯, 건축과 물질 환경에 초점을 맞췄던 초기 <심즈> 콘셉트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가족관계"라는 딸의 조언을 받아들여 '가족과 인간관계' 중심으로 전환되었다.

윌 라이트와 캐시디는 '로봇 제작'이라는 공통 취미를 통해 각종 로봇 경진대회, 특히 로봇 전투 대회인 '배틀봇(BattleBots)'에 함께 참가하며 유대를 다졌다. 윌 라이트는 <심즈>를 플레이할 때 항상 자신의 가족을 모델로 심을 만들고,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지 끊임없이 시뮬레이션하고 고민한다고 한다. 그에게 <심즈>는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만들어진 게임이며,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처럼 <심즈>를 통해 행복한 가정의 모습을 경험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훌륭한 게임 개발자를 꿈꾸는 이들에게 윌 라이트는 항상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심시티>가 제이 포레스터 교수의 도시 역학 연구에서 영감을 얻고, <심즈>가 크리스토퍼 알렉산더 교수의 『패턴 랭귀지』 없이는 탄생할 수 없었던 것처럼, 독서는 그의 창의력의 핵심 원천이었다. 그는 <심즈> 개발 과정에서 스콧 맥클라우드(Scott McCloud)의 『만화의 이해(Understanding Comics)』에서도 많은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밝힌 바 있다.

윌 라이트는 게임계의 폭력성 증가에 대해 우려를 표하며, 자신이라도 비폭력적이고 교육적이며 사회적인 게임을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게임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는 '재미'라는 원칙을 잊지 않는다. 교육적인 측면은 어디까지나 '보너스'이며, 플레이어가 교육받는다는 느낌 없이 자연스럽게 무언가를 배우고 경험하도록 게임을 설계하는 데 노력을 기울인다.

마지막으로 그가 게임 개발자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으로 꼽는 것은 '인내심'이다. 그는 자신이 뛰어난 두뇌보다는 인내심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5년 동안 <심시티> 개발에 매달리고, 7년 가까이 <심즈>의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기다린 것처럼, 인내심을 가지고 자신의 비전을 꾸준히 추구하다 보면 언젠가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 후배 개발자들에게 전하는 그의 조언이다.

그가 생각하는 최고의 게임은 '바둑'이다. 단순한 규칙 안에 무궁무진한 전략과 깊이를 담고 있는 바둑이야말로 궁극의 게임 디자인이라고 극찬한다.

윌 라이트 주요 작품 연표

2008년: 스포어 (Spore)

2004년: 심즈 2 (The Sims 2)

2002년: 심즈 온라인 (The Sims Online)

2000년: 심즈 (The Sims)

1996년: 심콥터 (SimCopter)

1993년: 심시티 2000 (SimCity 2000)

1991년: 심앤트 (SimAnt)

1990년: 심어스 (SimEarth)

1989년: 심시티 (SimCity)

1984년: 반겔링만의 습격 (Raid on Bungeling 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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