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블로 스타크래프트 신화를 만든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 빌로퍼
"게임 패키지에 적힌 회사나 게임 제목이 중요한 게 아니야. 사람들은 영화를 고를 때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나오는지, 스티븐 스필버그가 감독했는지를 보잖아. 책을 살 땐 작가가 누구인지 보는 것과 같지. 해리 포터의 J.K. 롤링처럼 말이야. 이렇듯 게임은 사람이 만드는 거야. 게임을 선택할 때는 누가 만들었는지를 보는 게 중요해."
빌 로퍼는 이 말처럼, 이름만으로도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만드는 게임 크리에이터 중 한 명이다. 해외에서도 그의 명성은 자자하지만, 솔직히 '게임 명예의 전당'에 오른 거물들에 비하면 아직 무게감이 조금은 부족하다는 평가도 있다. 세계적인 게임 웹진 '게임스파이'가 선정한 '게임계 영향력 있는 인물 30인'에 그의 이름이 빠졌을 정도니까.
그가 이끈 <스타크래프트>는 전 세계적으로 600만 장 이상 팔리며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이 숫자만 보면 대단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국에서만 무려 375만 장이 팔렸고, 나머지 해외 지역에서는 230여만 장 판매에 그쳤다. <스타크래프트>가 완전히 새로운 시스템을 선보인 게임은 아니었기에, 그의 명성은 상업적인 성공과 함께 가야 했다. 해외 판매량 230만 장은 훌륭한 게임 기획자의 성적표로는 나무랄 데 없지만, '위대한' 기획자로 불리기에는 살짝 아쉬운 수치일 수 있다.
그렇다고 빌 로퍼를 얕보는 건 절대 아니다. 그가 블리자드 노스 부사장직을 그만둔다고 했을 때, CNN은 이 소식을 속보로 전하며 "블리자드가 보석을 잃었다"고 표현했다. 그의 가치를 1억 달러 이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아직 명예의 전당 최상위권은 아닐지 몰라도, 언젠가는 그 자리에 오를 잠재력을 가진 인물임은 분명하다.
그가 참여한 <디아블로>는 출시된 해에 '최고의 게임'으로 뽑혔고, <스타크래프트>는 '최고의 전략 게임'으로 선정되었다. 게임 잡지들이 역대 최고의 게임 100선을 꼽을 때마다 <워크래프트>, <디아블로>, <스타크래프트> 등 그의 손길이 닿은 게임들은 항상 이름을 올린다. 명작 게임들을 위한 명예의 전당에도 그의 게임들은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지금처럼 꾸준히 업적을 쌓아간다면, 머지않아 명예의 전당 정식 회원으로 그의 이름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다.
특히 한국 게임계에 미친 그의 영향력은 실로 절대적이다. 오늘날 한국 게임 산업이 이만큼 성장하는 데 있어 그는 일등 공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바꾸고, 게임이 훌륭한 미래 산업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그는 한국 게임계의 산타클로스 같은 존재다.
(이 글을 쓰는) 내가 처음 게임계에 발을 들였을 때만 해도, 월급은 30~50만 원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제때 받기 어려웠다. '정말 게임 회사를 계속 다녀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던 그때, 그의 <스타크래프트>가 등장했다.
스타크래프트, 한국 게임계의 축복
<스타크래프트>의 등장은 한국 게임계에 내린 축복과 같았다. <스타크래프트> 열풍이 불기 직전인 1998년 여름, 나는 제이씨 엔터테인먼트에서 <워 바이블>이라는 MMORPG를 개발하고 있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당시 게임 최고 동시 접속자 수는 18명, 평균 접속자는 10명 남짓이었다. "게임에 접속자가 한 명도 없으면 회사에 치명타"라는 사장님의 압박에 직원들이 돌아가면서 게임에 접속해야 할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워 바이블> 접속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한 달 정액제 회원이 8명에서 순식간에 100명을 훌쩍 넘기는 사건이 벌어졌다. 불과 한 달도 안 되어 일어난 기적 같은 변화였다. 회사가 언제 망할지 모른다고 걱정했는데, 갑작스러운 유저 증가는 회사의 재정 상태를 단번에 호전시켰다. 1998년 여름은 정말 놀라운 일의 연속이었다.
<스타크래프트>는 개인적인 경험뿐 아니라 한국 경제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스타크노믹스'라는 책에서는 <스타크래프트>가 게임 개발사, 방송, PC방 등 연관 산업에 미친 경제 효과가 무려 1조 1400억 원에 달한다고 분석했다. 정말 놀랍고 대단하다는 말밖에는 할 수 없다. 게임 하나가 가진 힘이 얼마나 클 수 있는지, <스타크래프트>는 한국 사회에 똑똑히 보여주었다.
<스타크래프트>의 성공 덕분에 한국에서는 게임 산업의 가치를 재평가하게 되었고, 국가 차원의 지원도 이끌어냈다. 한국 게임 산업이 지금처럼 세계 3대 게임 강국을 목표로 할 만큼 단기간에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스타크래프트>가 게임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관을 깨뜨리고 새로운 자극을 주었기 때문이다. <스타크래프트>는 한국에서도 게임으로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첫 번째 성공 모델이 되었고, 수많은 벤처 게임 회사들이 투자를 유치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한국 게임 개발자들에게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강력한 동기 부여가 되어 개발 열정을 불태우게 만들었다. <스타크래프트>와 같은 신드롬은 앞으로도 다시 일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디아블로, MMORPG의 길을 열다
그가 한국 게임계에 준 또 다른 선물은 바로 <디아블로>다. 물론 <디아블로 1>은 <스타크래프트>보다 먼저 발매되었지만, 한국 게임계에 본격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스타크래프트> 성공 이후였다. <스타크래프트> 열기로 우후죽순 생겨난 PC방은 새로운 게임 콘텐츠를 필요로 했고, 이때 많은 한국 게임 개발자들에게 영감을 준 게임이 바로 <디아블로>였다.
<디아블로>는 마우스 클릭만으로 게임을 진행하는 획기적인 시스템을 선보인 롤플레잉 게임이었다. 마우스 포인터로 적을 선택하고 전투를 벌이는 '포인트 앤 클릭' 방식은 대규모 다중 접속 롤플레잉 게임(MMORPG)에 적용하기에 최적화된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한국의 온라인 게임 개발사들은 그가 창조해낸 이 전투 시스템을 MMORPG에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빌 로퍼는 한때 "한국 MMORPG는 디아블로의 클론(복제)"이라며 비판하기도 했다. 그의 지적에 우리가 쉽게 반박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게임은 완전히 새로운 창조보다는 기존의 것을 개량하며 발전하는 측면도 있다. 게다가 <리니지 2>처럼 완전 3D로 진화한 한국 게임들은 이제 <디아블로>와는 뚜렷한 차별점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의 발전된 한국 온라인 게임들을 생각하면 너무 억울해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우리는 빌 로퍼가 한국 게임계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음악가에서 블리자드의 핵심으로
블리자드는 1991년 마이크 모하임, 앨런 애드햄, 프랭크 피어스 세 사람이 창업했다. 처음 회사 이름은 '실리콘 & 시냅스'였고, 컴퓨터 게임보다는 펜과 종이로 즐기는 롤플레잉 보드 게임을 주로 만들었다. <락앤롤 레이싱>, <로스트 바이킹스> 같은 콘솔 게임을 개발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회사는 재정난에 시달렸고 빚만 늘어갔다. 결국 '데이비슨 앤 어소시에트'라는 회사에 인수되었지만, 다행히 '블리자드'라는 새 이름과 기존 경영진은 유지할 수 있었다.
자금에 숨통이 트인 블리자드는 PC 게임 <블랙쏜>을 인터플레이를 통해 발매하며 첫 성공을 맛보았다. 그리고 이 <블랙쏜>의 음악을 담당했던 인물이 바로 빌 로퍼였다. 그는 어린 시절 색소폰을 연주하며 음악의 매력에 빠졌고, 장래 뮤지션이 되기를 꿈꿨다.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에서 상업 음악을 전공하며 성악까지 공부했지만, 재즈와 록에 대한 열정은 그를 학교 밖으로 이끌었다. 결국 그는 대학 졸업을 포기하고 전문 뮤지션의 길을 걷기 위해 중퇴했다.
하지만 미국에서도 무명 뮤지션의 삶은 고달팠다. 트럭 운전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블리자드의 음악 외주 작업을 맡게 된다. 이렇게 그는 정식 직원이 아닌 파트타임으로 게임계에 발을 들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게임 기획자가 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던전 앤 드래곤> 같은 펜앤페이퍼 RPG를 즐기긴 했지만, 그 정도는 당시 미국 청소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져볼 만한 취미였다. 하지만 특유의 왕성한 호기심과 긍정적인 성격 덕분에 개발팀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고, 1994년 블리자드의 정식 직원이 되었다.
사실 처음에는 개발팀원들이 그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 게임 개발 경력도 없는 신참에다, 계약직 음악 담당자가 개발팀원들에게 일일이 찾아와 게임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자기 아이디어를 늘어놓으니 얼마나 귀찮았겠는가? 하지만 빌 로퍼는 특유의 넉살과 끊임없는 수다로 개발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곧 블리자드의 어엿한 일원이 될 수 있었다.
사람을 사로잡는 넉살과 리더십
지금도 기자가 한 가지 질문을 하면 세 가지 대답을 미리 쏟아낼 정도로 수다스럽기로 유명한 그의 소통 능력이 개발팀에게 인정받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화다. 이를 통해 나는 게임 기획자는 내성적이기보다 팀과 잘 어울리고 외향적인 성격이 더 적합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흔히 창의적인 사람은 다소 내성적이고 괴팍해서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할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다. 하지만 게임 개발은 철저한 공동 작업이다. 팀원들과 관계가 나쁘다면 좋은 작품은 결코 나올 수 없다. 불화가 있다면 게임은커녕 회사에 남아있기도 힘들다.
놀랍게도 게임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던 빌 로퍼는 정식 직원이 된 후 불과 1년 만에 개발팀 리더 자리까지 올랐다. 1년 사이에 엄청난 아이디어를 쏟아내서 인정받은 것이 아니다. 게임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개발팀에 대한 헌신적인 자세가 그를 초고속 승진의 길로 이끌었다. 또한, 그는 개발팀과 경영진 사이에서 훌륭하게 중간자 역할을 수행하며 신뢰를 얻었다. 개발팀원들은 그의 설득력이라면 경영진에게 자신들의 생각을 효과적으로 전달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게다가 <워크래프트>의 내레이션을 맡을 정도로 매력적인 목소리를 가졌으니, 그의 말은 더욱 힘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빌 로퍼가 팀을 대표해 경영진에게 할 말을 시원하게 하는 모습에 팀원들은 그를 더욱 신임하게 되었다. 그의 매력적인 목소리와 뛰어난 말솜씨는 회사 내부뿐 아니라 언론 인터뷰나 유저 행사에서도 큰 힘을 발휘했다.
게임 기획자로서 그의 '넉살'은 정말 부러운 점 중 하나다. 게임 기획자는 필연적으로 많은 개발자와 의견 충돌을 겪게 되고, 수많은 아이디어가 거절당하기 마련이다. 이런 과정에서 사람은 주눅 들고 수동적으로 변하기 쉽다. 하지만 빌 로퍼는 달랐다. 게임 경력도 미미했던 계약직 음악 담당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혀 주눅 들지 않고 개발팀원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주장하고 토론했다고 한다. 게임 제작 환경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게 뭐 대단한 일이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 개발 현장에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로 이어질 수 있기에 매우 조심스러운 행동이다. 빌 로퍼가 개발팀에게 이것저것 요구했던 것은 비유하자면 군대에서 이등병이 병장에게 명령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개발팀원들이 그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그 특유의 유머와 넉살 덕분에 결국 개발팀의 사랑을 받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의 넉살을 보여주는 또 다른 일화가 있다. 2002년 6월, <워크래프트 3> 홍보를 위해 빌 로퍼가 한국을 방문했다. 마침 그날은 2002 월드컵에서 한국과 미국의 예선 경기가 열리는 날이었다. 빌 로퍼와 한국 기자들은 호프집에서 축구 경기를 보며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때 축구를 보던 그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특유의 쇼맨십을 발휘하며 미국 국가를 열창하기 시작했다. 성악을 전공한 사람답게 우렁찬 목소리가 호프집 전체에 울려 퍼지자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당시 월드컵 기간 중에는 안톤 오노 사건으로 반미 감정이 상당히 높았던 시기라, 미국 국가를 부르는 그를 바라보는 손님들의 시선이 무척 따가웠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미국 국가를 불렀고, 결국 많은 사람이 그의 당당함과 넉살에 웃으며 박수까지 쳐주었다고 한다. 이런 넉살이 있었기에 계약직 직원에서 부사장까지 초고속 승진이 가능했으리라.
워크래프트, 디아블로, 그리고 배틀넷
1994년, 블리자드는 <워크래프트: 오크와 인간>을 출시했다. 판매량은 10만 장 정도였지만, '블리자드'라는 이름을 게임 유저들에게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워크래프트>에서 음악과 내레이션을 맡았던 빌 로퍼는 정식 직원으로 승격된 후, <워크래프트 2>의 수석 프로듀서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여 <워크래프트 2>를 크게 성공시켰다. 당시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의 최고봉으로 꼽히던 웨스트우드의 <커맨드 앤 컨커>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의 양대 산맥'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워크래프트 2>는 100만 장 이상 판매되었고, 블리자드는 단숨에 메이저 게임 회사로 발돋움했다.
재정적으로 여유가 생긴 블리자드는 여세를 몰아 기존에 프로그래밍 외주를 주었던 '콘도르(Condor)'라는 회사를 인수 합병한다. 콘도르는 데이비드 브레빅과 쉐퍼 형제가 공동 창업한 회사로, 당시 <X-COM>과 같은 턴 방식 전투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을 제작 중이었다. 그 게임이 바로 훗날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디아블로>의 초기 버전이었다.
하지만 빌 로퍼는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제작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제안을 했다. 턴 방식이 아니라, 마우스 클릭으로 실시간 전투를 벌이는 액션 롤플레잉 게임으로 수정해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처음 콘도르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 자신들이 구상했던 전략 게임의 틀 자체를 뒤흔드는 요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빌 로퍼는 끈질기고 간절하게 게임 방식 변경을 요청했다. 결국 양측은 시험 삼아 프로토타입을 함께 만들어 보기로 합의했다. 막상 게임을 구현해보니 예상치 못한 색다른 재미가 있었고, 이를 계기로 콘도르 개발자들도 빌 로퍼를 인정하게 되었다. 이때 블리자드는 콘도르를 인수하여 팀 이름을 '블리자드 노스'로 바꾸고, 데이비드 브레빅, 쉐퍼 형제, 그리고 빌 로퍼를 개발팀 공동 책임자로 임명했다.
<디아블로>는 빌 로퍼가 처음부터 아이디어를 낸 게임은 아니지만, 게임 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배틀넷(Battle.net)'이라는 혁신적인 온라인 멀티플레이 서비스를 <디아블로>에 도입할 것을 제안하여 게임 성공에 큰 기여를 했다.
배틀넷의 등장은 세계 게임계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배틀넷에 힘입어 <디아블로>는 500만 장 이상 판매되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마치 서태지가 음악계에 충격을 주었듯 게임계 전체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사실 <디아블로>가 처음 나왔을 때, 정통 롤플레잉 게임 마니아들은 탐탁지 않게 여기기도 했다. 기존 RPG의 장점인 높은 자유도나 깊이 있는 스토리가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만 해도 RPG는 순발력보다는 지적인 능력이 중요한 장르로 인식되었는데, <디아블로>는 이러한 고정관념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그래서 아직도 <디아블로>를 정통 RPG로 인정하지 않고, 단순히 반복적인 액션 어드벤처 게임(소위 '노가다 게임')이라며 폄하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턴 기반 전략 게임들이 실시간 전략 게임(RTS)에 밀려났듯이, 롤플레잉 게임에도 중대한 변화가 찾아오고 있었고, 그 변화의 중심에는 <디아블로>가 있었다. 정적인 느낌의 턴 기반 RPG는 점차 사라지고, 박진감 넘치는 전투와 화려한 마법 효과가 RPG 성공의 중요한 요소가 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 바로 <디아블로>였다.
특히 <디아블로>는 한국과 인연이 깊다. 어쩌면 현재 한국이 온라인 게임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절대적인 공헌을 한 게임이 바로 <디아블로>라고 할 수 있다. 포인트 앤 클릭 방식의 간단하면서도 중독성 있는 게임 플레이는 한국 온라인 게임 개발자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또한, 배틀넷을 통해 온라인 멀티플레이의 재미를 실제로 구현함으로써 온라인 게임에 대한 수요를 폭발시켰고, 한국 게임 개발자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디아블로>는 한국 게임 역사상 최초로 10만 장 이상 판매되며 수많은 한국 유저들을 열광시켰다. <디아블로>가 보여준 게임 시스템의 재미를 확인한 많은 한국 개발자들이 온라인 게임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특히 <바람의 나라>와 <쥬라기 공원>으로 이미 한국 게임계의 보물로 인정받던 송재경 이사는 <리니지>에서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했는데, 그 기반에는 <디아블로>의 포인트 앤 클릭 방식이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지금의 MMORPG가 발전하면 할수록, 그 뿌리에는 <디아블로>의 가치가 빛나고 있는 것이다.
스타크래프트, 시련 속에서 탄생한 걸작
오랜 발매 연기 끝에 1998년 출시된 <스타크래프트>가 처음 등장했을 때, 많은 사람들의 실망감을 나는 생생히 기억한다. 당시 다른 게임들이 3D 그래픽을 내세우며 화려함을 뽐냈지만, <스타크래프트>는 고작 256색의 2D 그래픽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최신 유행과는 거리가 먼, 왠지 모르게 촌스러운 그래픽이었다. 초기 반응은 "<듄 2>의 아류작 아니냐"는 비판이 많았다. 그렇지 않아도 블리자드는 웨스트우드의 <커맨드 앤 컨커>를 따라 한다는 원색적인 비난을 듣던 터였다. 이러한 불안감은 <스타크래프트>가 발매되기 전 참가했던 E3 게임쇼에서부터 감지되었다. 공개된 게임 스크린샷은 뭔가 표현하기 힘든 어설픔이 느껴졌고, 전 세계 게임 마니아들의 불만이 쌓여가고 있었다.
게다가 <스타크래프트> 개발은 처음부터 치밀한 계획하에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단순히 "<워크래프트>는 판타지 배경이었으니, 이번엔 <스타워즈>처럼 우주를 배경으로 게임을 만들어보자"는 단순한 생각에서 출발했다. 이러니 블리자드에 대한 미덥지 못한 마음까지 생겨났다.
설상가상으로, <4D 복싱>과 <하드볼> 시리즈로 유명한 게임 크리에이터 크리스 테일러가 제작에 참여한 최초의 3D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토탈 어나이얼레이션>이 등장하면서 <스타크래프트>는 결정타를 맞고 만다. <토탈 어나이얼레이션>이 발매되자 <스타크래프트> 제작진은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블리자드 내부 개발진들은 게임 제작 의욕을 상실할 정도였다. "우리가 만드는 게임은 결국 실패하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들은 그때까지 만들고 있던 게임을 완전히 뒤엎어 버리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결정이 한국 게임계에는 오히려 축복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아는 <스타크래프트>가 탄생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어찌 됐든, 이 과정에서 보여준 빌 로퍼의 결단력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만들던 게임을 완전히 갈아엎는다는 것은 정말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중단하는 것에 반발하는 것은 회사 경영진뿐만이 아니다. 개발자들 역시 강한 반발심을 갖기 마련이다. 자신이 지금까지 쏟아부은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버추어 파이터>의 아버지 스즈키 유도 어쩔 수 없이 만들던 게임을 한번 뒤집었던 적이 있는데, 그러자 몇몇 개발자들은 회사를 그만두고 심지어 스즈키 유 앞에서 욕설을 퍼붓거나 실제로 주먹다짐까지 벌일 정도로 분위기가 험악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빌 로퍼가 <스타크래프트>를 뒤엎었을 때는 팀원들과의 큰 문제는 없었다고 한다. 팀원들 스스로 "우리가 진짜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완성도 높은 게임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토탈 어나이얼레이션>이 준 충격이 컸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해외 판매량만 놓고 보면 <토탈 어나이얼레이션>이 <스타크래프트>를 압도했다. <토탈 어나이얼레이션>의 해외 판매량은 무려 500만 장이 넘었지만, <스타크래프트>는 230여만 장에 불과했다. 한국에서 375만 장이라는 경이적인 판매량을 기록했기에 <스타크래프트>가 그나마 자존심을 지킨 것이지, 한국 시장을 제외하면 제작비를 고려했을 때 평작 수준의 성과였다. 어쨌든 <토탈 어나이얼레이션>이 나오기 전의 <스타크래프트>와 이후의 <스타크래프트> 사이에는 엄청난, 혹은 놀라운 변화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토탈 어나이얼레이션> 덕분에 게임의 완성도 측면에서 훨씬 진보하는 계기가 된 것 또한 분명하다.
비록 <스타크래프트>가 시대에 뒤떨어진 그래픽 때문에 초기에 냉담한 반응을 얻었지만, 게임의 진정한 가치는 시간이 흐르면서 빛을 발하기 마련이다. <스타크래프트>의 진짜 재미는 싱글 플레이가 아니라 네트워크 플레이, 즉 멀티플레이에 있었다. <스타크래프트>는 종족 간의 밸런스가 완벽하게 잡힌 최초의 게임이었다. 기존 게임에서 '종족'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그래픽적인 차이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스타크래프트>의 프로토스, 테란, 저그 세 종족은 게임 플레이 방식 자체를 완전히 다르게 해야 할 정도로 완벽하게 차별화되었고, 서로 물고 물리는 절묘한 상성 관계를 이루었다.
이러한 차별점은 혼자 하는 싱글 플레이보다 여러 사람이 함께 즐기는 멀티플레이를 통해 그 진가가 드러났다. <스타크래프트> 덕분에 한국에서는 초고속 인터넷망이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고, 이는 다시 <스타크래프트>가 오랫동안 생명력을 유지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해외에서 <스타크래프트>가 한국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얻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는 어쩌면 한국처럼 초고속 인터넷 환경이 잘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네트워크 플레이야말로 <스타크래프트>의 참맛인데, 다른 나라 유저들은 그 맛을 제대로 즐길 환경이 부족했던 것이다. 만약 전 세계적으로 한국처럼 초고속 인터넷이 보급되었다면, <스타크래프트>는 지금보다 훨씬 더 큰 성공을 거두었을 것이다.
<스타크래프트> 성공 이후 한국 게임 시장에서는 '<스타크래프트> 킬러'를 자처하며 많은 게임들이 등장했지만, 결국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스타크래프트>는 7년이 넘는 시간 동안 '황제'의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단순히 시장 선점 효과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핵심은 바로 '종족 간 밸런스'로 대표되는 게임의 완성도다. 아무리 화려한 그래픽을 자랑해도 게임 밸런스가 무너지면 졸작으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다. 7년이 넘도록 게임이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플레이할 때마다 새로운 전략과 전술을 가능하게 하는 완벽한 게임 밸런스 덕분이다. 이 완벽한 밸런스 덕분에 사람들은 게임 결과에 수긍할 수 있었고, e스포츠로서도 꾸준히 인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완성도를 향한 집념: 스트라이크 팀과 소통
이러한 게임 완성도를 위해 빌 로퍼는 자신이 직접 이끄는 '스트라이크 팀(Strike Team)'을 운영했다. 스트라이크 팀은 일종의 품질 관리팀이자 대규모 베타테스터 그룹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스트라이크 팀 운영을 통해 게임 마니아들과 소통하고 피드백을 받는 방법을 배웠다고 한다. 그는 어쩌면 현재 가장 앞서나가는 게임 크리에이터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제 완전히 새로운 게임 장르가 탄생하기는 어려워진 시대다. 중요한 것은 기존 장르 안에서 얼마나 높은 완성도를 구현하느냐이다. 그리고 그 완성도는 대규모 테스트를 통해 고객들의 반응을 듣고, 그것을 게임에 반영하고 수정하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
그런 점에서 빌 로퍼는 확실한 강점을 가지고 있다. 그는 게임 테스트 집단의 소중함을 이미 세계 최초로 제안하고 구현했던 배틀넷의 성공을 통해 깨달았다. 덕분에 그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품질 관리 집단 중 하나인 스트라이크 팀을 효과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수많은 노하우를 습득했다.
어쩌면 21세기의 성공적인 게임 크리에이터는 완전한 천재형으로 새로운 장르를 창조하는 사람보다, 빌 로퍼처럼 기존 장르 안에서 고객의 요구를 최대한 받아들여 완성도를 극한까지 끌어올릴 줄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고객의 의견을 경청하는 과정에서 획기적인 게임 아이디어가 나올 수도 있지 않겠는가? 혼자 고민하는 것보다 많은 사람의 의견을 듣는 것이 좋은 게임 아이디어를 얻는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빌로퍼의 게임 기획 철학과 결혼 비법
그가 생각하는 좋은 게임이란 "배우기는 쉽지만 마스터하기는 어렵고, 플레이할 때마다 새로운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게임"이다. 그는 게임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는 항상 게임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순간에도 <GTA> 같은 게임 아이디어가 떠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영화를 통해서도 많은 영감을 얻는다. <스타크래프트>의 저그는 영화 <에일리언>에서, 프로토스는 영화 <프레데터>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플래그십 스튜디오라는 회사 이름 역시 팀원들과 함께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을 보고 나서 '기함(旗艦, 함대의 지휘관이 타는 배)'을 뜻하는 '플래그십'으로 결정한 것이다. 커다란 배의 모든 선원이 힘을 합쳐 험난한 바다를 헤쳐나가듯, 회사의 모든 직원이 하나 되어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또한, 게임이라는 거친 바다를 자유자재로 항해할 수 있는 베테랑들이라는 의미도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책 역시 그에게 중요한 아이디어의 원천이다. 그가 개발한 <헬게이트: 런던>도 <언더그라운드 런던>이라는 책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그는 또한 많은 사람과의 교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대규모 베타테스트 팀인 스트라이크 팀을 운영했던 경험은 이 부분에서 그에게 확실한 강점을 제공한다.
최근 게임 시장에서 가정용 게임기의 비중이 커지면서 PC 게임이 몰락하고 있다는 의견에 대해, 그는 일부 동의하면서도 PC 게임은 온라인 게임이라는 새로운 플랫폼을 통해 계속 발전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누구보다 게임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특히 지금의 아름다운 아내와 결혼하게 된 계기도 바로 게임이었다. 원래 친구 사이였던 두 사람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당시 여자친구였던 (현재 아내)의 집에 놀러 갔다. 마침 그때 <디아블로 2>를 재미있게 플레이하던 그녀는 빌 로퍼에게 자신이 키운 로그 캐릭터를 보여주었다. 높은 레벨의 캐릭터를 능숙하게 조작하는 그녀의 모습에 빌 로퍼는 강한 매력을 느꼈고, 그날 이후 두 사람은 연인으로 발전하여 결국 결혼에 골인,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