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시나리오는 하나의 세상을 창조하고 스토리텔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야 한다.

게임기획개론: 시나리오편(8) 




게임 시나리오는 하나의 세상을 창조한다.

다른 예술 매체와 게임 시나리오의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는 매력적인 세계관 설정의 중요성이다. 영화나 책은 대개 현실 세계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창작이 시작되기에, 게임 시나리오에 비해 새로운 세계관을 구축하는 작업에 들이는 시간이나 노력이 상대적으로 적은 경우가 많다. 하지만 게임 시나리오는 유저들이 체험하는 가상 환경을 구축해야 하는 만큼, 하나의 세상을 철저하고 치밀하게 설정하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 유저들은 게임을 선택할 때부터 게임의 세계관을 살펴보고 게임 속 세상이 과연 내가 체험하고 살아보고 싶은 공간인지 생각한다. 

그래서 게임 시나리오 작가는 게임 속 세계가 다른 게임보다 독창적이고 매력적인 공간이 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이는 새로운 세계관을 구축한 반지의 제왕, 영웅문, 스타워즈와 같은 작품의 창작 과정과 유사하다. 반지의 제왕은 판타지 세계를, 영웅문은 무협 세계를, 스타워즈는 우주 SF 세계를 창조하여 전체 창작 업계에 신기원을 이룩했다. 그런데 이들은 본격적인 스토리를 쓰기 전에 다양한 자료를 찾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와는 완전히 다른 하나의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내기 위해 연구했다.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과 문화는 물론이거니와 정치 체제, 역사, 철학까지 창조해냈다. 게임은 이러한 작품들처럼 하나의 뚜렷한 세계관을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 물론 게임이 앞서 언급한 반지의 제왕, 영웅문, 스타워즈와 같은 작품의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WOW가 비록 반지의 제왕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게임 시나리오 작가는 새로운 종족을 설정하고 그들의 역사도 쓰고 다른 종족 간의 관계도 정립해야 한다. 각 종족이 추구하는 문화, 철학, 가치관도 작성해야 한다. 뛰어난 세계관으로 사랑받는 롤플레잉 게임의 경우, 보통 5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작업이 이루어진다.

사실 스타워즈는 시나리오 내용보다는 화면 속에서 보여주는 세계의 경이로움 덕분에 오늘날까지 큰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머릿속으로만 상상하던 것을 현실로 구현하게 되면 그 자체로 쾌감을 느끼고 감동한다. 스타워즈는 단지 눈으로 감상하는 것이지만, 게임은 실제로 그 세상에 들어가 직접 체험하고 탐험한다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세계관 설정의 디테일 측면에서도 게임은 더욱 깊이 연구하고 풍부한 자료를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세계관 설정이 잘 되어 있다면 게임 시나리오 작업 역시 여러 면에서 용이해진다. 왜냐하면 세계관이 독창적이면 그만큼 그 세계 속에서 풀어낼 이야깃거리가 풍부해지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영화 시나리오 이론가인 로버트 맥기는 판타지 장르의 세계관이 정교하게 구축될수록 작가의 상상력을 더 자극하게 된다고 말했다. 하나의 세상을 창조해서 그 안의 질서와 규칙을 만드는 것은 게임 시나리오 작가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기도 하지만 가장 매력적인 작업이기도 하다. 마치 세상을 만들어 낸 절대자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게임은 컴퓨터라는 마법을 써서 사람들이 한 번쯤 가보고 싶거나 살아보고 싶은 세상을 가상의 환경으로 만들어 놓고, 사람들이 마음껏 탐험하고 즐길 수 있도록 한다. 기획자는 그런 세상의 설계를 하고, 프로그래머는 그곳의 물리 법칙을 구현하며, 그래픽 디자이너는 외형을 만든다. 그리고 게임 시나리오 작가는 바로 그 세상에 영혼을 불어 넣는 일을 하는 것이다.

게임 시나리오는스토리텔링이 중요하다

게임 시나리오의 구성과 구조는 사건과 사건이 연속적으로 벌어지는 내러티브(이야기의 진행 구조)가 탄탄해야만 한다. 이러한 주장에 어떤 사람들은 소설, 영화, 드라마 모두 이야기를 전달하는 매체로서 스토리텔링이 중요할 텐데, 게임 시나리오에서 스토리텔링을 유독 강조하는 이유를 모를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는 이야기 구성이나 구조가 다소 부족하더라도 다른 요소로 채워 넣는 경우가 많다.

 소설은 이야기 진행이 거의 없거나 인간의 고독한 삶과 모순을 표현하는 데 집중하며, 전체 지면을 독백과 묘사로 채워도 호평받거나 인기를 얻는 경우가 많다. 영화는 스토리 전개가 미미하고 특수 효과나 음악 등을 통해 비주얼과 이미지로 승부하는 작품들이 존재한다. 드라마 역시 내러티브가 빈약하거나 이른바 '대사빨'만으로 인기를 얻는 경우가 있다. 수많은 드라마가 후반부로 갈수록 새롭게 밝혀지는 사실 없이 이야기 상황의 변화도 없이 회상 장면이나 뮤직비디오 같은 연출을 반복해도 시청률이 유지되기도 한다. 하지만 게임은 이야기 진행이 없다면 게임 전체의 몰입을 방해할 정도로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다. 게임에는 다른 매체와 달리 사용자의 참여가 존재한다. 

사용자들은 화면에 나온 대사를 읽거나 화려한 동영상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기 위해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다. 사용자는 게임 속에서 뭔가를 직접 체험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게임 시나리오가 개입될 때는 잠시 게임 플레이를 멈추고 화면을 응시해야 한다. 이때 시나리오는 최소한 유저들이 게임 컨트롤러를 잠시 놓고 화면을 감상할 만한 가치가 있어야 한다. 게임 화면 속에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거나 의미 없는 동영상은 유저들의 시간을 낭비하게 만드는 행위가 된다. 드라마나 영화가 재미없다면 단지 감상하는 시간을 빼앗기는 것이지만, 게임에서는 플레이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이기에 기회비용 측면에서 배신감이 더 크게 느껴진다.

이는 게임이 도전과 해결이라는 두 가지 축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게임에서는 유저에게 일종의 도전 과제를 제시한다. 유저는 게임 플레이를 통해 그 도전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다. 도전 과제를 완수하면 유저는 일종의 보상을 받는다. 좋은 무기를 얻거나 레벨이 향상되어 더 많은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식이다. 그런데 게임에서는 시나리오도 하나의 보상으로 제공된다. 임무를 완수한 유저는 시나리오를 통해 보상받고 싶어 하는 심리가 있는데, 이야기 진행이 없다면 크게 실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유저는 사건을 해결하는 영웅으로서 하나의 역할을 맡아 게임을 한다. 그런데 유저는 악당 캐릭터와 싸우면서 속으로 생각한다. '내가 만약 이 악당을 쓰러뜨리면 분명 내가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될 거야'라는 기대감을 갖게 된다. 그러한 기대감을 충족시켜주는 게임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이 훌륭한 작가가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게임 시나리오는 임무를 맡기 전의 스토리와 임무를 해결한 후의 스토리가 반복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임무를 맡기 전의 스토리는 일종의 브리핑 형식을 띠기도 하는데, 유저들에게 최대한 궁금증을 유발해야 한다. 그리고 임무를 끝낸 후에는 그 궁금증을 해결해주고 또다시 새로운 궁금증을 유발할 사건을 제시해야 한다. 그래서 게임 시나리오는 퀴즈쇼를 진행하는 듯한 느낌으로 진행된다. 요즘 텔레비전에서는 알고 있으면 유익한 여러 가지 주제를 가지고 수수께끼처럼 문제를 내고 답을 내는 연예 오락 프로그램이 인기를 얻고 있다. 나이 드신 어른들이 잘 모르는 신조어나 요즘 젊은이들이 잘 모르는 잊힌 옛 단어들의 정답을 맞히는 상상 플러스의 '올드 앤 뉴'라든가 건강에 대한 상식을 묻는 '동안 클럽' 등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게임 시나리오도 바로 올드 앤 뉴나 동안 클럽처럼 문제를 내고 해답을 제시하는 것과 유사한 부분이 많은데, 한 가지 더 참고해야 할 것이 있다. 정답을 맞혔을 때의 짜릿함과 틀렸을 때의 벌칙 부분이다. 올드 앤 뉴에서는 깔때기로 때리거나 동안 클럽에서는 사각 틀에 매달려 있어야 하는 등 특색 있는 벌칙이 쇼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야심만만에서 '바람맞기' 벌칙이 인기를 끈 후에 각종 퀴즈 형식의 프로그램에서는 각각 독특하면서도 재미있는 벌칙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게임은 한 번 실패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시도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마련이다. 게임 시나리오에서는 실패했을 때의 아쉬움을 극적으로 표현해 주어야 하며, 다시 한번 게임 속 임무에 도전하고 싶게 만드는 내용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로버트 맥기는 작가에게 있어 재능 또는 능력은 두 가지로 나뉜다고 했다. 하나는 문장력이고 다른 하나는 이야기를 만드는 능력이다. 문장력은 대사나 묘사를 작성할 때 필요한 능력으로, 소설가에게 특히 중요한 능력이다. 그런데 이야기를 만드는 능력은 미디어 믹스의 시대에 작가로 살아남기 위해 가장 필요한 스킬이기도 하다. 소설 작품이 영화로 바뀌게 되면 스토리 부분만 원작에서 차용할 뿐, 각종 독백과 묘사는 활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영화의 원작이 된 소설을 쓴 톰 클랜시, 스티븐 킹, 마이클 크라이튼 등의 작품은 스토리텔링 부분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작가인 공지영 씨는 문체에 신경 쓰기보다는 스토리텔링에 중점을 두는 작가이다. 이로 인해 문학계의 평단에게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미디어 믹스 시대에 작가로 명성을 쌓고 싶다면 문체에 신경 쓰기보다는 스토리텔링에 비중을 두는 작가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하나의 작품이 다양한 미디어의 원작이 되는 콘텐츠를 남길 수 있으니 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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