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시나리오 작가의 숙명: '나만의 이야기'는 없다

게임기획개론: 시나리오편 (9)

게임 시나리오는 공동작업의 산물이다




뛰어난 소설가가 영화업계로 쉽게 진출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영화가 공동 작업의 산물이라는 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 생기는 문제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혼자 작품을 쓰는 데 익숙한 소설가는 시나리오를 완성하면 영화 스태프들이 그대로 영상으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다. 우선 감독이 시나리오를 보고 내용을 수정하도록 요구하며, 자본을 대는 제작자나 배우들도 많은 간섭을 한다. 소설가는 쓰고 싶은 이야기를 자신의 뜻대로 마음껏 쓰면 그것으로 끝이지만, 영화 시나리오는 완성 후에도 협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많은 소설가가 자기 작품에 대한 애착과 고집이 유달리 강한 탓에 이러한 작업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 영화 시나리오 작업을 그만둔 뒤 본업으로 돌아가곤 한다. 그래서 영화 시나리오 작가의 중요한 능력 중 하나는 다른 사람과 잘 협력하고 소통하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다. 영화 시나리오 작가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쓰고 싶은 사람은 절대 영화를 해서는 안 된다"고 할 정도로 공동 작업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게임의 경우는 영화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영화는 그래도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시나리오를 수정하고 확정하지만, 게임은 전혀 그렇지 않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게임 플레이 방식과 시스템을 결정해 놓고 게임 시나리오를 추가하는 것이 일반적인 게임 제작 방법이다. 그래서 게임 시나리오 작가는 자유롭게 작가주의적 관점에서 창작 정신을 발휘하기보다는, 우선 자신이 참여하는 게임이 무엇인지 확실히 파악한 후 게임을 빛내줄 맞춤형 시나리오를 제공해야 하는 기술자와도 같다.

미야모토 시게루는 게임 제작팀원들에게 '너무 열심히 일하지 말라'고 자주 충고한다. 게임 기획자가 일을 열심히 하면 그만큼 게임 제작자들이 해야 할 일이 늘어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개발팀원들을 녹초로 만들기 일쑤다. 게임 기획자는 시간과 개발팀원의 역량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어 게임을 디자인해야 한다. 특히 그래픽 디자이너는 자신이 맡은 그림에 많은 욕심을 내기 마련이다. 이런 대표적인 예는 픽사의 디지털 애니메이션을 보면 알 수 있다. 1995년에 나온 '토이 스토리'는 그림 한 장을 컴퓨터로 렌더링하는 데 두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2005년, 픽사의 신작인 '카(Cars)'의 한 장면을 렌더링하는 데는 무려 15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컴퓨터 성능이 300배 향상되었음에도 시간은 오히려 7배나 늘어난 것이다. 그래픽 디자이너들은 할 수만 있다면 최고의 리얼리즘에 도전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려 했고, 그 결과 화면 속에 표현할 것이 더 많아졌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카구치 히로노부는 디지털 애니메이션 '파이널 판타지'를 개발할 때 그래픽 디자이너의 창작력을 고취하고자 가능하면 그들의 작업에 간섭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그래픽 디자이너는 남들이 신경 쓰지 않는 낙엽의 세부 묘사를 위해 무려 한 달이나 시간을 들였다고 한다. 처음 사카구치 히로노부는 그런 그래픽 디자이너의 의욕을 높이 샀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영화 제작비에 큰 부담을 주는 행동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래픽 디자이너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욕심이 거의 무한대에 가깝기 때문에, 현실 상황과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프로젝트 매니저가 조율해 주어야 한다.

그런데 게임은 디지털 애니메이션 창작자들보다 더욱 과욕을 부려서는 안 되는 분야다. 그래픽 디자이너가 일을 열심히 하면 파일 용량이 큰 그림을 그리기 마련인데, 컴퓨터는 메모리 한계가 있어 그래픽 파일 용량만큼 다른 요소를 빼야 한다. 한 파트가 너무 열심히 하면 다른 분야의 사람이 게임 속에서 자신의 재능을 그만큼 펼치지 못하게 되는 것이 게임 제작의 속성이다. 사실 게임 그래픽 디자이너끼리도 이런 문제로 자주 충돌한다. 

몬스터를 그리는 디자이너는 자신이 원하는 몬스터를 화려하고 멋지게 그리고 싶어 더 많은 용량을 요구한다. 주인공 캐릭터를 그리는 디자이너 역시 더 많은 자원을 지원해 달라고 하고, 배경을 그리는 디자이너들도 표현하고 싶은 것이 많다며 충분한 용량을 요구한다. 하지만 컴퓨터의 한계를 고려해 결국 적당한 선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들은 타협해야 한다. 게임 시나리오 작가 역시 열심히 작업할수록 전체 개발팀의 일이 늘어나게 되므로, 제작 여건을 고려해야 한다.

또한 게임 개발 작업 자체가 중간에 많은 변화를 겪는 만큼, 게임 시나리오도 끊임없이 수정을 요구받게 된다. 한 게임 잡지 기자가 코나미의 부사장이자 기획자인 코지마 히데오에게 1년 후쯤 나올 '메탈 기어 솔리드'의 시나리오가 어떤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러자 코지마 히데오는 "매일 스토리가 바뀌기 때문에 지금 당장 이야기해 줄 수 없다"고 답했을 정도다. '바이오하자드'는 발매 직전 주인공의 성별이 바뀌기도 했고, '쉔무'는 캐릭터의 성별이 지역에 따라 다르게 설정되기도 했다. 사실 게임 시나리오의 변화는 거의 매일 일어날 정도로 빈번하다.

게임이란 공동 작업의 산물인 만큼, 게임 시나리오도 팀의 사정에 따라 변화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러한 현실을 분명히 인지하고 팀을 위해 작가의 고집도 꺾고 변화된 내용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안타깝지만, 몇 달 동안 썼던 시나리오가 모두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는 것이 게임 제작의 현실이다. 세계 최고의 게임 크리에이터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피터 몰리뉴는 '사상 최고의 롤플레잉 게임'을 만들겠다며 '페이블'을 자랑했다. 

하지만 막상 출시된 '페이블'은 그가 공언했던 게임과는 많이 달랐다. 그는 이로 인해 살해 위협까지 당했을 정도였다. 사실 피터 몰리뉴의 게임이 원래 구상과 다르게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기술적 한계 때문이었다. 만약 피터 몰리뉴가 처음 기획했던 내용을 모두 반영하려 끝까지 개발을 밀어붙였다면 '페이블'은 시장에 출시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도 어쩔 수 없이 팀을 위해 자신의 고집을 꺾고 게임을 내놓았다. 그의 고집을 꺾은 결정은 100만 장이 넘는 판매고로 회사 재정에 기여했으니, 피터 몰리뉴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런데 피터 몰리뉴가 약속했던 것 중 하나는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게임 시나리오였다. 그가 게임 출시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게임 시나리오의 놀라운 점들을 강조했던 것을 보면, 결국 미리 작성했던 게임 시나리오들은 허공으로 날아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게임 제작이란 그런 것이다. 그래픽 디자이너나 프로그래머가 당초 약속된 시나리오에 맞춰 개발하다가 기술이나 제작 역량의 한계로 변화나 수정이 가해지는 것은 부지기수다. 그런 상황을 시나리오 작가로서 자존심 문제로 생각하지 말고, 팀 전체를 고려하는 팀워크를 발휘해야 한다.

그래서 애초에 작업할 때부터 게임 시나리오는 중간에 변화하고 수정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는 것이 좋다. 대사 같은 세부 작업보다는 세계관 설정처럼 전체 윤곽부터 분명하게 결정하고, 그다음 스토리 플롯과 같은 뼈대를 차근차근 구성하는 것이 좋다.

사실 소설, 만화, 영화, 드라마 같은 예술 매체에서는 일부러 스토리라인을 생각하지 않고 우선 캐릭터를 먼저 결정한 후 작품을 쓰는 작가들이 많다. 소설에서는 시드니 셸던이 대표적이다. 플롯 같은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우선 매력적인 캐릭터를 떠올린 다음, 시드니 셸던 스스로 철저히 그 캐릭터에 몰입해 느껴지는 감정과 생각을 소설로 쓴다고 한다. 그는 소설을 쓸 때면 "내가 소설을 쓰는 건지, 캐릭터가 하는 이야기를 받아 적는 건지 모르겠다"는 말을 남겼을 정도다. 일본의 유명 만화가 아다치 미츠루 역시 전체 이야기를 미리 구상하지 않고, 마치 야구를 관전하듯 캐릭터들의 행동을 지켜본다고 한다. 야구에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듯, 자신도 만화를 그릴 때 앞으로 이야기 전개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말한다.

하지만 게임 시나리오의 경우, 위에서 언급한 시드니 셸던이나 아다치 미츠루처럼 작업했다가는 정말 큰코다친다. 왜냐하면 게임 시나리오는 다른 예술 작품처럼 작가 혼자의 생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 제작 상황에 따라 많은 변화를 겪기 때문이다. 영화 시나리오는 제작 전에 완성하고 들어간다. 게임은 개발 상황과 맞물려 함께 진행되는 것이다. 실제로 게임 시나리오 작가에게는 순간적인 재치와 임기응변 또한 중요한 능력이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세계관 설정이다. 세계관은 게임 기획 및 그래픽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중간에 바뀔 확률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세계관을 탄탄하게 구축하면서 개발 중인 게임을 철저히 분석하고 이해해야 한다.

게임 방식이 실제 컴퓨터상에서 구현되는 엔진이 완성되면, 그다음 비로소 세부적인 스토리라인을 구상하는 것이 좋다. 스토리라인도 시작과 중요 이벤트를 구성하고, 중간중간 중요한 사건별로 정리하는 것이다. 시나리오가 추가될 때마다 기획자와의 상의는 기본이며, 그래픽 디자이너나 프로그래머를 통해 실제 제작 상황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불필요하게 시나리오를 먼저 작성했다가 나중에 게임 내용 변화로 시나리오 전체가 수포로 돌아가는 치명적인 상황을 최소화하기 위함이다. 게임 시나리오는 언제든 변경될 수 있지만, 너무 중요해서 바꿀 수 없는 핵심 내용부터 작업해두는 것이다. 게임 배경이 판타지였는데 제작 중에 무협물로 바뀌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계속>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기획의 오해와 진실: 스티브 잡스는 어떻게 세상을 움직였나?

게임의 전설 윌 라이트(2): 좌절 끝에 피어난 '심즈' 혁명, 게임의 역사를 다시 쓰다

스티브잡스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들 15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