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기획자: 세상을 창조하는 멀티플레이어, 현대 게임 개발의 핵심

게임 기획개론: 기획편(2)




“우리는 “예술가”가 아니라 “창작자(Creator)”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더 새롭고 더 재미있는 게임을 창작해 내는 것입니다. 예술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죠. 혹자는 게임을 디지털 오락을 내용으로 하는 예술의 한 형태라고 하지만 저는 게임은 가지고 놀기 위한 장난감이라고 합니다.”

테츠야 노무라 (파이널 판타지 디렉터)

위에 테츠야 노무라의 말이 거슬릴 수 있다. 앞에서는 종합 예술 작가라면서 이제는 예술가가 아니라고 하니 이율배반적이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테츠야 노무라가 바라보는 예술에 대한 가치관이 조금 다를 뿐이다. 드래곤 퀘스트의 게임 기획자인 호리이 유지는 게임에서 오직 재미만을 추구한다고 한다. 반면 파이널 판타지의 게임 기획자인 사카구치 히로노부는 재미에 감동까지 더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감동을 더해 게임을 예술의 경지로 이끌고 싶었던 것이 사카구치의 꿈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게임을 단순한 재미의 수단으로 보든, 감동을 선사하는 예술의 형태로 보든 그것은 기획자 개인의 가치관과 철학의 차이일 뿐, 옳고 그름을 평가할 필요는 없다. 각자 게임에서 무게를 두고 구현하고 싶은 것이 다를 뿐이다. 다만 테츠야 노무라의 말을 인용한 것은 게임 기획자는 혼자만의 만족을 위해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다 같이 즐기는 ‘상품’을 개발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게임 기획자는 ‘크리에이터’라는 사실이다. 미국에서는 게임 기획자를 ‘디자이너’라고 하고, 일본에서는 ‘크리에이터’라고 부른다. 한미일이 게임 기획자를 지칭하는 말이 다른 것은 흥미로운 지점이다. ‘게임 기획자’라는 말 자체에 반감을 가지는 사람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무언가를 도모하고 추진한다는 ‘기획’의 의미가 충분히 타당하고 멋지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일본에서는 왜 게임 기획자를 크리에이터라고 불렀을까? 그것은 게임 기획자가 디지털 가상 세계의 ‘창조자(Creator)’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을 창조한다.(We create worlds)”라고 말한 울티마의 기획자 리처드 개리엇의 이 한마디는 게임 기획자의 역할을 정확하게 응축한다. 게임 기획자는 디지털 가상 세계 안에서 플레이어들이 즐겁게 참여하고 몰입할 수 있는 환상적인 공간을 창조하는 매력적인 직업이다. 이 공간을 다스리는 규칙과 그곳에 사는 캐릭터를 설정하는 것이 기획자의 첫 번째 역할이다. 세계관 설정에는 플레이어가 애착을 가질 캐릭터, 매력적이고 환상적인 세계, 그리고 그 세상을 지배하는 규칙을 창조해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최고의 크리에이터는 조지 루카스다. 루카스는 ‘스타워즈’라는 거대한 세계를 만들어 냈다. ‘스타워즈’는 영화로 시작해 책, 게임 등 다양한 문화 장르로 확장되었다. 이는 스타워즈의 세계관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증거다. 최근 원 소스 멀티 유스(OSMU)의 바람이 불고 있다. 과거에는 훌륭한 소설을 기반으로 영화화되고, 이후 게임화되는 순서였지만, 이제는 처음부터 영화, 소설,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장르로의 진출을 염두에 두고 콘텐츠를 제작한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콘텐츠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세계관’이다. 게임 기획자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러한 콘텐츠 흐름을 이해하고, 전체 장르를 아우르는 세계관을 창조하는 크리에이터가 되어야 한다. 루카스가 ‘스타워즈’ 세계관을 창조하며 했던 일을 우리도 기획에 반영할 줄 알아야 한다. 결국 우리가 루카스처럼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창작에 대한 열정과 신선하고 독창적인 상상력이다. 이것이 게임 기획자로 살아남기 위한 기본적인 자질이다.

하지만 이러한 창조자로서의 역할이 게임 기획자의 전부일까? 현실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사람을 즐겁게 하고 싶다는 소망으로 게임 기획자가 되지만, 막상 현업에 뛰어들면 여러 난관에 부딪힌다. 출근 첫날부터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업무가 명확하지 않다는 딜레마에 빠지기도 한다. 이는 초보뿐 아니라 모든 게임 기획자가 겪는 어려움이다. 다만 경력 기획자는 게임 기획이 정해진 시스템으로 업무가 나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사실 ‘게임 기획자’라는 말 자체가 포괄적인 만큼, 팀 내 역할과 포지션도 모호할 때가 많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명확한 선이 없어 그래픽 디자이너나 게임 마스터의 일과 겹치는 것처럼 느껴져 혼란스러워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로 인해 자신의 존재감에 회의를 느끼고 수동적인 사람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자신감이 없는 기획자는 좋은 결과물을 낼 수 없다. 게임 기획자는 창조적 에너지로 충만해야 하며, 그 원천은 ‘내가 세상을 움직이는 주인공’이라는 확고한 믿음에서 나온다. 따라서 팀 내에서 자신의 역할과 포지션을 분명히 하고 존재감을 각인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인정받는 기획자가 될 수 있을까? 게임 기획은 단순 작업이 아니므로, 결국 기획자는 ‘멀티플레이어’가 되어야 한다. 물론 기획 분야도 컨셉, 레벨, 퀘스트, 밸런싱, QA 등으로 세분화되기도 한다. 하지만 게임 개발 패러다임은 변화하고 있다. 과거 세가처럼 철저한 분업으로 효율성을 추구하던 시대도 있었다. 프로그래머는 자신이 만드는 게임조차 모르고 명세서에 따라 작업했고, 그래픽 팀도 분리되어 리소스를 공급했다. 이는 효율 극대화와 기밀 유지를 위한 것이었지만, 개발자의 창의성을 저해하고 게임의 질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세가의 분사와 유명 기획자들의 독립은 일본 게임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는 대규모 팀의 분업보다는 소규모 팀의 협력 위주, 민첩한 개발 형태로의 전환을 암시한다. 영화계가 제작사 중심에서 프로젝트별 팀 구성으로 변했듯이, 게임계도 그렇게 변하고 있다. 실제로 최근 게임 회사들은 한 가지 기술만 가진 사람보다 여러 일을 할 수 있는 멀티플레이어를 선호한다. 히딩크 감독이 강조했던 멀티플레이어 개념이 게임계에서도 중요해진 것이다. “나는 레벨 디자이너니깐 밸런싱은 몰라도 돼”라는 생각은 위험하다. 블리자드에서 디아블로2 제작에 참여한 이장욱 씨에 따르면, 미국 유명 제작사들은 이미 한 사람이 다양한 분야에 참여하는 협력 체제가 더 효율적이라고 본다. 특정 팀만 바쁘고 다른 팀은 쉬는 비효율을 줄이기 위해, 한국 개발사들도 협력 시스템을 구축 중이다.

이러한 추세를 이해하고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해야 한다. 회사에서 시키는 일만 기다리는 수동적인 자세로는 신뢰를 얻을 수 없다. 팀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레벨 디자인, 밸런싱, PM, 컨셉, 시나리오 등 업무가 주어지지만, 이들은 명확히 구분되지 않고 서로 겹친다. 한국에서는 아직 분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도 많다. 이때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거나 업무를 한정해서는 안 된다. 개발팀 전체의 흐름을 이해하고, 다른 업무에 투입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전문 분야가 있더라도 다른 파트가 바쁘면 기꺼이 도울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이것이 팀 내에서 인정받고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길이다. 최근 채용 시 다양한 경험을 가진 사람을 선호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시대가 원하는 기획자는 바로 올라운드 플레이어, 즉 창조적인 멀티플레이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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