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의 전설 윌라이트(1) 모두가 'NO'라고 할 때… 세상을 바꾼 게임 '심시티' 탄생 비화 (feat 천재성)
윌 라이트: 유년 시절과 영감의 시작
1960년 7월 20일, 윌 라이트는 미국의 대표적인 남부 도시인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윌리엄 라이트는 화학자이자 라이트 플라스틱사의 사장이었다. 그러나 윌 라이트가 아홉 살 되던 해,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베버리 에드워즈는 자녀 양육을 위해 고향으로 이사했고, 이때부터 윌 라이트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변해갔다. 친구들 사이에서 '괴짜' 혹은 '기인'으로 불릴 정도로 혼자 있는 시간을 즐겼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습득하겠다는 야망으로 독서에 몰두했으며, 이때 쌓은 지식이 훗날 큰 자산이 되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그의 또 다른 취미는 프라모델 제작이었다. 로봇과 배 모형을 만들어 방 안에 장식하는 것을 좋아했고, 이 취미는 훗날 로봇 경연대회에 직접 만든 로봇으로 참가하여 수상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컴퓨터와의 운명적 만남과 게임 개발의 꿈
윌 라이트에게 가장 큰 충격을 안겨준 것은 컴퓨터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는 컴퓨터를 보자마자 프로그래밍을 통해 인공지능을 구현하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을 느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루이지애나 주립대학, 루이지애나 기술대학, 뉴스쿨 대학 등을 다녔지만, 어느 곳에서도 졸업장을 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5년간 대학 생활을 통해 건축, 기계공학, 컴퓨터, 로봇에 대한 전문 지식을 쌓았다. 그러던 어느 날, 퍼스널 컴퓨터를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을 컴퓨터 게임을 통해 다시 한번 경험하게 된다. 브루스 아트윅 프로덕션에서 만든 '마이크로소프트 플라이트 시뮬레이터(Microsoft Flight Simulator)'는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이 게임에 깊이 빠져든 그는 직접 게임을 개발하기로 결심한다. 마침 획기적인 성능의 코모도어 64 컴퓨터가 등장하자,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게임을 구현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아마추어 조종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던 그는 헬리콥터를 소재로 한 액션 슈팅 게임 디자인에 착수했다. 8,000라인에 달하는 프로그래밍 코드를 직접 작성하고 그래픽 작업까지 도맡아, 1인 개발 시스템으로 '반겔링만의 습격(Raid Over Bungeling Bay)'을 완성했다.
첫 작품: 반겔링만의 습격과 예상치 못한 성공
게임 유통사 브로더번드(Broderbund)를 찾아간 윌 라이트는 게임 시연만으로 즉시 유통 계약을 따냈다. 헬리콥터가 섬 위를 날아다니며 적들을 섬멸하는 직관적인 게임 화면이 브로더번드 관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1984년, '반겔링만의 습격'은 브로더번드를 통해 판매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불법 복제로 인해 2만장 정도의 판매에 그치는 부진을 겪었다. 반면, 복제가 불가능한 카트리지 방식으로 출시된 일본에서는 무려 100만 장이 팔리는 대히트를 기록하며 그에게 첫 경제적 성공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윌 라이트 자신은 이 게임을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단순히 적을 쏘고 맞히는 액션 게임은 그가 추구하는 게임의 방향과 달랐다. 그는 목표물을 파괴하는 단순한 액션을 넘어, 심오하고 기존에 없던 새로운 장르의 게임을 만들고 싶다는 갈망을 품게 되었다.
<아하!> 첫눈에 반하다
뛰어난 게임 크리에이터들은 공통적으로 컴퓨터와의 첫 만남을 잊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존 카멕은 컴퓨터를 본 순간 프로그래머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음악에 모든 것을 걸었던 사카구치 히로노부는 친구 집에서 애플 컴퓨터를 접한 후 즉시 음악을 포기하고 컴퓨터의 세계에 빠져들었습니다. 리처드 개리엇 역시 컴퓨터를 보자마자 롤플레잉 게임 개발을 꿈꿨습니다. 가장 극적인 만남은 피터 몰리뉴의 경우일 것입니다. 비즈니스 데이터 프로그래머였던 그는 회사 이름 착오로 아미가 컴퓨터 14대를 기증받게 되었고, 컬러 그래픽을 구현하는 이 컴퓨터로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 게임 개발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세계적인 크리에이터와 컴퓨터의 첫 만남은 마치 운명적인 사랑처럼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창조의 기쁨을 담은 게임을 향하여
윌 라이트는 게임이 단순한 오락 이상의 의미를 갖기를 바랐다. 그는 '반겔링만의 습격'을 플레이하는 것보다 개발 과정, 특히 게임 배경과 사물을 배치하는 맵 에디터 작업이 훨씬 더 재미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를 통해 그는 '무언가를 만드는 창조의 순간'이야말로 인간이 진정한 재미를 느끼는 핵심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후 그는 플레이어가 게임 속에서 직접 무언가를 만들며 창조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게임 개발에 몰두했다. 수많은 책을 읽으며 아이디어를 구체화했고, 특히 도시 역학과 시스템 역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MIT 제이 포레스터(Jay Forrester) 교수의 저작에서 큰 영감을 얻었다. 제이 포레스터는 인구, 출생률, 부동산, 범죄, 공해 등 약 20개의 변수를 이용해 도시를 시뮬레이션하려는 시도를 한 바 있었다.
심시티의 탄생과 기나긴 좌절
윌 라이트는 제이 포레스터의 도시 시뮬레이션 아이디어를 게임으로 구현하기로 결심하고, '반겔링만의 습격'에서 사용했던 맵 에디터를 수정하여 프로토타입 제작에 착수했다. 게임의 내용은 플레이어가 시장이 되어 학교, 병원, 도로, 발전소 등을 건설하고 세금을 걷는 등 도시를 경영하는 것이었다. 도시 운영 성과에 따라 인구가 늘거나 줄고, 여론 조사가 변화했지만, 게임에는 정해진 엔딩이 없었다. 플레이어는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심지어 자신이 만든 도시를 파괴할 수도 있었다.
약 6개월의 개발 끝에 윌 라이트는 이 게임을 브로더번드에 다시 선보였다. 초기 반응은 호의적이었고 계약까지 체결했지만, 브로더번드는 '성공과 실패의 명확한 기준이 없는' 이 게임의 방향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승패가 분명해야 플레이어가 목표 의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당시 게임 업계의 상식이었다. 목표 없이 건물을 짓는 것은 게임이 아니라 단순한 시뮬레이션일 뿐이라는 주장이었다.
윌 라이트는 자신의 비전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다른 유통사를 찾아 나서야 했다. 하지만 미국의 모든 게임 유통사로부터 거절당했다. 그의 게임을 본 사람들은 대부분 어리둥절해했고, 면전에서 모욕적인 말을 듣기도 했다. 당시 게임에 대한 고정관념은 그에게 큰 시련을 안겨주었다. 유통사를 찾지 못한 그는 1987년까지 '마이크로폴리스(Micropolis)'라 이름 붙인 이 도시 건설 시뮬레이션 게임을 오클랜드의 아파트에서 홀로 개발하며 끊임없이 수정해야 했다. 출시 자체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개발은 난관에 부딪혔고, '반겔링만의 습격'으로 벌었던 돈도 점차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는 깊은 좌절감에 빠졌다.
운명적 만남: 제프 브라운과 맥시스의 설립
그러던 어느 날, 프로그래머들이 모인 파티에서 윌 라이트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바로 평생의 친구이자 맥시스(Maxis)의 공동 창립자가 될 제프 브라운(Jeff Brown)을 만난 것이다. 제프 브라운은 게임 업계 사람들과 교류하기 위해 자신의 아파트에서 파티를 열었다. 우연히 그의 옆자리에 앉게 된 윌 라이트는 자신이 개발 중인 도시 건설 시뮬레이션 게임 '마이크로폴리스'에 대해 설명했다. 제프 브라운은 윌 라이트의 아이디어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며칠 후, 제프 브라운은 윌 라이트의 게임을 직접 보고 즉시 합류를 결심했다. 윌 라이트는 당시 제프 브라운이 게임을 보자마자 큰 흥미를 보이며 "무척 재미있을 것 같다"고 말했을 때 큰 힘과 용기를 얻었다고 회상한다. 수많은 거절로 자신감을 잃고 게임에 대해 비관적인 생각마저 하고 있던 그에게 제프 브라운의 순수한 감탄과 지지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윌 라이트는 제프 브라운을 '영원의 친구'라고 부를 정도로 깊은 신뢰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게임에 대한 확신을 가진 제프 브라운은 함께 회사를 설립하여 게임을 완성하자고 윌 라이트를 설득했다. 처음에는 망설였던 윌 라이트도 제프 브라운의 굳은 의지에 용기를 얻어 맥시스를 공동 창립하게 된다. '맥시스'라는 이름은 제프 브라운의 아버지가 지어준 것으로, '아침 6시(SIX AM)'를 거꾸로 배열한 것이다.
마침내 완성된 심시티
맥시스 창립 후에도 당장 큰 변화는 없었다. 개발 장소가 윌 라이트의 집에서 조금 더 넓은 제프 브라운의 아파트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개발이 진척되면서 몇 명의 프로그래머가 합류했고, 어셈블리어로 작성되었던 '마이크로폴리스' 코드를 C언어로 변환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때 게임 이름도 '심시티(SimCity)'로 변경했다. '마이크로폴리스'라는 이름이 이미 다른 하드웨어 업체에서 사용 중이어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심시티'라는 이름은 당시 프로그래머로 일했던 마이클 브래머(Michael Bremer)의 아이디어였다. 개발 중인 게임은 시장과 시민(Sim)의 관계가 중요했고, 시장의 정책에 따라 시민들의 행동이 달라지는 점에 착안하여 '심들의 도시(City of Sims)'라는 의미로 '심시티'를 제안한 것이다.
드디어 1989년, 5년간의 기나긴 개발 여정 끝에 게임이 완성되었다. 당시 널리 사용되던 매킨토시와 아미가 버전으로 심시티를 출시하려 했지만, 정작 게임을 포장하고 유통할 자금이 부족했다. 결국 윌 라이트와 제프 브라운은 다시 한번 브로더번드의 문을 두드리게 된다.
<아하!> 부끄러움이 많은 윌 라이트
윌 라이트는 지금도 제프 브라운과의 첫 만남을 신기하게 생각합니다. 평소 부끄러움을 많이 타고 내성적인 성격 탓에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특히 낯을 가렸습니다. 프로그래머 파티에 참석하긴 했지만, 그는 누구에게도 말을 걸지 못하고 자리에 멀뚱히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침 파티 주최자인 제프 브라운이 옆자리에 앉았고, 놀랍게도 윌 라이트는 처음 보는 그에게 자신의 게임에 대해 청산유수처럼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평소 성격을 생각하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윌 라이트는 그때의 만남이야말로 운명적인 인연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심시티 출시와 브로더번드의 엇갈린 반응
완성된 게임을 본 브로더번드는 의외로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완전한 확신은 아니었다. 유통은 브로더번드가 담당하되, 포장 비용 등 제반 경비는 맥시스가 부담하는 조건이었다. 자칫 기분이 상할 수도 있는 제안이었지만, 윌 라이트는 이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 자신도 게임의 성공을 확신하지 못했기에, 유통을 맡아준다는 것만으로도 브로더번드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예상 밖의 성공과 사회적 파급력
그러나 게임이 발매되자마자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게임은 순식간에 입소문을 타고 퍼져나가 1989년 한 해에만 300만 장 이상 판매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Newsweek)>가 심시티를 집중 조명하며 '기존 상식을 뛰어넘는 최고의 게임'이라고 극찬했다.
이후 심시티는 권위 있는 게임 시상식에서 24개의 상을 휩쓸며 그해 최고의 게임으로 등극했다. 심시티는 게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무려 1만 개가 넘는 교육기관에서 심시티를 교재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게임이 학교 교재로 사용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심시티는 단순한 게임, 그 이상이었다. 게임이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준 선구적인 사례가 되었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