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계의 대부, 시드 마이어 (1): '해적'과 '문명' 이전, 전설의 시작

 



"게임 크리에이터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고 가장 재미있는 직업이에요. 그래서 저는 세계 최고의 행운아죠."


시드 마이어는 블랙앤화이트 시리즈의 피터 몰리뉴, 울티마 시리즈의 리처드 개리엇과 함께 세계 3대 게임 개발자로 꼽힙니다. 하지만 그는 명예의 전당에 오른 다른 크리에이터들과는 다른 면이 있습니다. 게임 역사에 획을 긋는 새로운 장르를 창조하여 천재라는 격찬을 듣는 크리에이터가 아니며, 게임 역사상 최다 판매량을 기록하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크리에이터도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명예의 전당은 새로운 장르를 창조하거나 역사상 가장 성공한 게임을 만든 사람의 전유물처럼 여겨지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게임 크리에이터가 명예롭게 생각하는 거의 모든 상을 받았습니다. 특히 미국 컴퓨터 박물관 명예의 전당에 게임 크리에이터로는 유일하게 헌액될 정도이니, 많은 이들이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 게임 크리에이터를 수식하는 가장 좋은 말은 '사상 최초' 혹은 '사상 최대'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기사를 팔기 위한 언론의 언어적 유희에 가까울 때가 많습니다. 실제 게임 산업 전체를 보면, 크리에이터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꾸준함'과 '다양함'으로 평가해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시드 마이어야말로 컴퓨터 게임계의 대부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반짝 스타'라는 말이 있습니다. 운 좋게 스타가 되었지만 금방 한계를 드러내고 사라지는 이들을 우리는 쉽게 보아왔습니다. 게임계에도 혜성처럼 나타나 천재 소리를 들었지만, 후속작의 실패와 함께 사라진 크리에이터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시드 마이어는 20년 넘게 정상의 자리를 지켜왔습니다.

또한, 그가 50세가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게임 개발 현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합니다. 현재 게임 크리에이터로 알려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발 일선에서 물러난 지 오래입니다. 디렉터나 프로듀서라는 직함을 달고 수십 개의 프로젝트에 약간의 조언을 해주는 것만으로 제작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계적인 명성 때문에 그들이 개발에 깊이 관여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홍보를 위한 얼굴마담에 불과한 경우도 허다합니다. 하지만 시드 마이어는 정말 다릅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게임을 개발하는 사람입니다. 게임 개발 일선에서 모든 것을 진두지휘하며, 자신의 이름에 책임을 지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일반적으로 게임 크리에이터들은 30대에 전성기를 누리고 40대가 되면 하향세를 보이며 제작 일선에서 물러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게임은 유행에 민감해서 나이가 들면 감각이 떨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52세에 '문명 4'를 내놓으며 다시 한번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세계적인 게임 웹진 IGN과 게임스팟에서 게임 플레이 부문 10점 만점을 받는 저력을 과시했죠. 게임 기획자인 필자로서도 경이로움을 감출 수 없는 일입니다. 이는 마치 45세의 로저 클레멘스가 메이저리그 방어율 왕이 된 것에 비견될 만합니다.

게임 기획자들의 소망 중 하나는 50세가 넘어서도 게임을 만들고, 자녀와 함께 자신이 만든 게임을 즐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꿈같은 희망 사항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시드 마이어는 그것이 현실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몸소 증명해주었습니다.

시드 마이어는 1954년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났습니다. 학창 시절 책과 보드게임을 특별히 좋아했다는 점 외에는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역사, 해적, 비행기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는데, 이는 훗날 '문명', '해적', '스트라이크 이글' 같은 게임 개발에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가 즐긴 보드게임으로는 경영 게임 '모노폴리'와 다양한 전쟁 게임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그가 턴 기반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을 만드는 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미시간 대학에서 역사학과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그는 제너럴 인스트루먼트라는 컴퓨터 회사에 시스템 관리자로 취직합니다. 편의점이나 상점의 자동화 계산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직원 교육 및 유지보수를 담당했죠. 물론, 밤에는 컴퓨터 게임을 즐기는 게임 마니아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게임 개발자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인생이 180도 바뀐 것은 운명적으로 빌 스텔리(Bill Stealey)를 만나면서부터입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우연이었지만 운명적인 결합이었습니다. 시드 마이어는 컴퓨터 관련 컨퍼런스 참석차 라스베이거스의 MGM 그랜드 호텔에 갔고, 마침 빌 스텔리도 같은 컨퍼런스를 보기 위해 호텔에 도착했습니다. 컨퍼런스에서 주선된 미팅 자리에서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것입니다.

빌 스텔리는 미 공군 대령 출신의 전투기 조종사였습니다. 평소 비행기에 관심이 많았던 시드 마이어는 미 공군 대령으로 펜타곤에서 근무하는 빌 스텔리에게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보며 금세 친해졌습니다. 시드 마이어는 오락실에 새로 나온 비행 슈팅 게임을 같이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게임을 즐겨 하던 시드 마이어는 연전연승하며 놀라운 실력을 선보였고, 반대로 빌 스텔리는 연패를 거듭했습니다. 실전 경험이 풍부한 전투기 조종사로서 자존심이 상한 빌 스텔리는 시드 마이어에게 어떻게 그렇게 잘할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시드 마이어는 적들의 움직임에 일정한 패턴이 있으며, 그 패턴을 예측하면 쉽게 이길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때 시드 마이어는 빌 스텔리에게 게임의 인공지능, 컴퓨터 게임 제작 방법 등에 대해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시드 마이어의 지식에 깊은 감명을 받은 빌 스텔리는 그와 함께 게임을 만들면 성공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습니다. 마침 시드 마이어가 "2주의 시간만 주면 훨씬 좋은 게임을 만들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자, 빌 스텔리는 즉시 게임 회사 공동 창업을 제안했습니다.

처음 시드 마이어는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당시 게임은 일시적인 유행일 뿐이며,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고 불확실한 사업에 뛰어드는 것은 무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빌 스텔리는 2주 넘게 끈질기게 설득했습니다. 시드 마이어의 개발 실력이라면 충분하며, 판매는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장담했습니다. 펜타곤 근무 경력과 펜실베이니아 대학 MBA 학위를 가진 빌 스텔리의 인맥과 마케팅 능력이라면 판매도 문제없어 보였습니다. 시드 마이어 역시 게임 개발 실력만큼은 자신 있었습니다.

결국 시드 마이어는 빌 스텔리의 설득에 넘어가 공동 창업을 결심합니다. 빌 스텔리가 판매를, 시드 마이어가 개발을 책임지기로 하고, 1500달러를 모아 메릴랜드주 헌트 밸리에 마이크로 프로즈(MicroProse)를 설립했습니다.

회사를 열자마자 처음 한 일은 둘의 우정을 맺어준 비행 아케이드 게임 '레드 바론'을 사무실에 설치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확신이 없어서 원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지 않고 몰래 게임을 개발하는 '투잡'을 뛰었습니다. 6개월 동안 낮에는 회사에 출근하고 밤에는 모여 게임을 개발하다가, 게임의 윤곽이 드러나고 확신이 생기자 비로소 회사를 그만두고 게임 개발에 전념했습니다.

'레드 바론보다 훨씬 좋은 게임을 만들겠다'는 시드 마이어의 말에서 시작된 마이크로 프로즈는 1년 정도의 연구 기간을 거쳐 비행 시뮬레이션 게임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스핏파이어 에이스(Spitfire Ace)', '솔로 플라이트(Solo Flight)', '아크로젯(Acrojet)', '스트라이크 이글(Strike Eagle)' 등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마이크로 프로즈는 전쟁 게임 전문 회사로 명성을 쌓아갔습니다. 군사 전문가인 빌 스텔리는 게임의 사실성을 높이는 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의 방대한 군사 지식은 시드 마이어가 잠수함 시뮬레이션 '사일런트 서비스(Silent Service)', 유럽 전장을 다룬 '나토 커맨더(NATO Commander)', '크루세이드 인 유럽(Crusade in Europe)' 등 실제와 같은 시뮬레이션 게임을 개발하는 데 큰 동기를 부여했습니다.

1987년, 비행기와 전쟁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노하우를 쌓은 시드 마이어는 어린 시절의 로망이었던 해적 이야기를 게임으로 만들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빌 스텔리는 반대했습니다. 전쟁/군사물 전문 회사 이미지가 있는데, 뜬금없이 해적 게임을 만들면 팔리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였습니다.

하지만 시드 마이어는 해적 게임 개발을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러자 빌 스텔리는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그동안 'F-16 스트라이크 이글' 등으로 유명해진 시드 마이어의 이름을 게임 표지에 사용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시드 마이어가 만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게임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져 판매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었습니다.

처음 시드 마이어는 자신의 이름이 게임 제목에 붙는 것을 쑥스러워했지만, 해적 게임을 만들고 싶은 마음에 빌 스텔리의 제안에 동의합니다.


최초로 게임 타이틀에 게임 크리에이터의 이름을 사용하다




빌 스텔리의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습니다. '시드 마이어의 해적(Sid Meier's Pirates!)'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된 이 게임은 회사 역사상 가장 성공한 게임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게임 타이틀에 개발자의 이름을 단 것은 이때가 최초였기에, 시드 마이어는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영화를 선택할 때 감독을 보고 고르듯이, 이제 게임도 '누가 만들었는지'가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는 시대를 연 것입니다. 사실 이전까지 게임 회사들은 인력 유출을 우려해 개발자들을 외부에 잘 알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드 마이어는 절친한 동업자 빌 스텔리 덕분에 최초로 게임 타이틀에 크리에이터 이름을 올린 사람으로 기록될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게임 개발에서 회사보다 실제 개발자가 더 중요하다는 인식을 부각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해적'의 성공 이후, 시드 마이어는 더욱 새롭고 실험적인 게임으로 자신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도록 노력했습니다. 그러던 중 '심시티(SimCity)'의 성공을 지켜보며, 건설 요소에 경영 요소를 결합할 아이디어를 떠올립니다. 그것이 바로 철도를 소재로 한 '레일로드 타이쿤(Railroad Tycoon)'이었습니다. 철도 회사를 운영하며 역을 건설하고, 경영, 교역, 주식 거래 등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이 게임은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이었습니다. 겉보기에는 어려워 보였지만, 한번 시작하면 빠져들 수밖에 없는 매력을 선사했습니다.

계속된 성공에 힘입어 시드 마이어는 더욱 대담한 시도를 합니다. 바로 인간 문명의 시작과 발전을 테마로 한 게임 개발에 착수한 것입니다. 이는 게임 역사상 전무후무한 시도였습니다. 인간 역사와 컴퓨터 기술을 꿰뚫는 탁월한 식견 없이는 불가능한 기획이었습니다. 게임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만 수개월이 걸렸습니다. 게임 하나에 정치, 경제, 군사, 외교, 사회를 모두 담으려는 시도는 무모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어린 시절 즐겼던 보드게임을 참고하며 점차 게임의 틀을 잡아나갔습니다.

'문명'이라는 테마는 매력적이었지만, 게임으로 만드는 과정은 정말 복잡했습니다. 아무리 사실적이라도 재미가 없으면 소용없었습니다. 플레이어가 어려움 없이 게임을 바로 이해하고 진행할 수 있도록 직관적인 인터페이스와 게임 플레이를 제공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해냈습니다.

'시드 마이어의 문명(Sid Meier's Civilization)'은 플레이어가 그리스나 로마 같은 문명의 지도자가 되어 문명을 발전시키고 세계를 정복하는 게임입니다. 문명을 발전시키기 위해 플레이어는 역사 지식을 활용하여 정치, 경제, 군사, 사회, 문화, 과학, 외교 등 다양한 분야를 통치하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덕분에 게임을 통해 다양한 분야의 식견을 쌓을 수 있었고, 게임의 교육적 효과가 다시 한번 부각되었습니다. '문명'은 게임의 놀라운 가능성을 보여준 게임으로 높은 평가를 받으며 시장에 나오자마자 수백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고, 오늘날 그가 세계 최고의 게임 크리에이터로 인정받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습니다.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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