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RPG의 거장, 사카구치 히로노부 이야기 (2부): 스크린을 향한 꿈, 좌절 그리고 새로운 항해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의 눈부신 성공으로 스퀘어는 황금기를 맞이했습니다. '로맨싱 사가', '크로노 트리거', '성검전설' 등 명작 RPG들을 연이어 배출하며 회사는 탄탄대로를 걸었고, 이는 JRPG의 거장 사카구치 히로노부에게 게임을 넘어선 새로운 꿈을 꾸게 만들었습니다.
스크린을 향한 거대한 야심, 1700억 원의 꿈
스토리텔링에 대한 그의 열정은 게임을 넘어 영화로 향했습니다. 픽사의 3D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에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100% 컴퓨터 그래픽(CG)으로 영화를 만들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웁니다. 당시 일본의 CG 기술력에 한계를 느낀 그는, 하와이에 스퀘어 픽처스를 설립하고 세계 최고 수준의 아티스트들을 모아 '실사 같은 CG 인간 캐릭터 구현'이라는 전례 없는 도전에 나섭니다.
'파이널 판타지'라는 강력한 브랜드와 스퀘어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영화 '파이널 판타지: 더 스피릿 위딘' 프로젝트는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영화 제작 경험이 부족했던 사카구치의 예술가적 완벽주의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는 제작 효율성이나 예산보다 오직 최상의 퀄리티만을 추구했습니다. 화면에 거의 보이지 않는 디테일까지 완벽하게 구현하려 했고, 이는 제작 기간의 지연과 비용의 기하급수적인 증가로 이어졌습니다. 4년이 넘는 제작 기간, 투입된 제작비는 무려 1억 3700만 달러(당시 약 1700억 원)에 달했습니다.
꿈의 좌절과 스퀘어와의 이별
2001년, 큰 기대 속에 개봉한 영화는 '파이널 판타지'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흥행에 참패하고 맙니다. 제작비의 절반도 회수하지 못한 이 실패는 스퀘어를 심각한 재정 위기로 몰아넣었습니다. 회사는 소니의 긴급 자금 수혈로 간신히 파산을 면했지만, 실패의 책임은 프로젝트를 주도했던 사카구치에게 집중되었습니다.
<아하!> 사카구치는 다른 작품에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그는 그 점을 숨기지 않습니다. '트랜실바니아'를 보고 어드벤처 게임을, '드래곤 퀘스트'에 감동받아 '파이널 판타지'를 만들었습니다. '토이 스토리'를 보고 영화 제작에 뛰어들었으며, MMORPG '에버퀘스트'를 재미있게 한 후 '파이널 판타지 XI'(온라인) 개발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주주들의 압박으로 스퀘어 부사장직에서 물러나며, 오랜 시간 몸담았던 회사를 떠나게 됩니다. (정확히는 2001년 사임 후 2003년 고문직 종료) 스퀘어와의 갑작스러운 이별은 그에게 큰 충격과 상실감을 안겼습니다. 그는 하와이로 돌아가 게임계를 떠나 조용한 시간을 보내며 재충전을 시도했습니다. 한때 소설가가 되려고 글을 쓰기도 하며 방황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하!> 사카구치는 게임계를 은퇴하려 했다.
스퀘어 사임 후, 그는 게임계를 영영 떠나 소설가가 되려 했습니다. 실제 몇 작품을 써보기도 했지만, 결국 게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안갯속을 걷다: 미스트워커의 새로운 항해
약 1년 반의 공백기 후, 그는 하와이 해변에서 지난날의 영광과 좌절을 곱씹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다는 생각과 함께, 게임 개발에 대한 꺼지지 않은 열정을 확인합니다. 2004년, 그는 일본으로 돌아와 자신의 새로운 스튜디오 '미스트워커(Mistwalker)'를 설립합니다. '안개 속을 걷는 사람'처럼 불확실한 미래지만 묵묵히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담은 이름이었습니다.
초심으로 돌아가 소규모로 시작하려 했지만, 그의 이름값은 여전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차세대 게임기 XBOX 360의 성공을 위해 그에게 거액의 투자를 제안하며 독점 RPG 개발을 의뢰한 것입니다. 그의 복귀 소식에 과거 '파이널 판타지'를 함께 만들었던 핵심 개발자들, 그리고 토리야마 아키라, 이노우에 다케히코, 시게마츠 키요시 등 각 분야의 최고 창작자들이 기꺼이 합류했습니다. 그의 리더십과 인망이 다시 한번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미스트워커는 XBOX 360으로 '블루 드래곤'과 '로스트 오디세이'라는 두 편의 대작 RPG를 선보이며 화려하게 부활했습니다. 비록 이 게임들이 과거 '파이널 판타지'의 영광을 재현하지는 못했지만, 사카구치 히로노부의 건재함을 알리기에는 충분했습니다. 이후 그는 '라스트 스토리', 모바일 게임 '테라 배틀', '판타지안' 등 플랫폼을 넘나들며 꾸준히 자신만의 색깔이 담긴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거장의 게임 철학: 감동과 신선함을 향한 끊임없는 탐구
사카구치 히로노부는 게임을 통해 재미를 넘어 '감동'을 전달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크리에이터입니다.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플레이어가 게임을 통해 소설이나 영화 이상의 깊은 감정적 경험, 때로는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순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영화 제작의 실패는 그에게 값비싼 교훈을 남겼습니다. 특히 본격적인 개발 전, 충분한 실험과 검증을 거치는 기획 단계(프리 프로덕션)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다고 합니다. 또한 창의적인 작업과 관리 업무를 분리하여 효율성을 높이는 시간 관리의 중요성도 강조합니다.
그의 게임 제작 철학의 핵심은 '신선함'입니다. 그는 RPG라는 장르 안에서도 항상 새로운 시스템과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시도하며 팬들에게 놀라움을 선사하고자 합니다. 때로는 이런 도전이 개발 과정을 어렵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는 타협하지 않고 자신만의 비전을 추구합니다. 그는 플레이어에게 주인공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그래픽, 사운드, 게임 시스템의 완벽한 조화가 필수적이라고 믿습니다.
수많은 영광과 혹독한 실패를 모두 겪어낸 JRPG의 거장. 그는 여전히 안개 속을 걷는 탐험가처럼, 게임이라는 매체를 통해 새로운 감동과 재미를 선사하기 위한 도전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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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대표작
1984년 데스 트랩 (The Death Trap)
1986년 킹스 나이트 (King's Knight)
1987년 파이널 판타지 (Final Fantasy)
1995년 크로노 트리거 (Chrono Trigger) (프로듀서/스토리 원안)
1998년 패러사이트 이브 (Parasite Eve) (프로듀서/스토리 원안)
2001년 파이널 판타지: 더 스피릿 위딘 (Final Fantasy: The Spirits Within) (영화 감독)
2002년 파이널 판타지 XI (Final Fantasy XI) (프로듀서)
2006년 블루 드래곤 (Blue Dragon) (미스트워커)
2007년 로스트 오디세이 (Lost Odyssey) (미스트워커)
2011년 라스트 스토리 (The Last Story) (미스트워커)
2014년 테라 배틀 (Terra Battle) (미스트워커)
2021년 판타지안 (Fantasian) (미스트워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