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계의 혁신가, 피터 몰리뉴: 갓 게임과 끝나지 않는 야망
"나는 한때 게임이 스노보드와 같이 일시적인 유행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게임은 영화의 최고 경쟁자이다. 와우~! 정말 놀랍지 않은가?" - 피터 몰리뉴 (영국 명예 훈장 수상 소감 중)
피터 몰리뉴는 리처드 개리엇(울티마 시리즈), 시드 마이어(문명 시리즈)와 함께 흔히 '세계 3대 게임 개발자'로 불린다. 울티마로 RPG의 새 장을 열고 MMORPG 시대를 개척한 개리엇이나, 자신의 이름을 타이틀에 걸고 시뮬레이션 게임의 아버지가 된 마이어에 비해 그의 위상에 의문을 가졌던 시기도 있었다. 그가 단지 '갓 게임(God Game)' 장르를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동급으로 평가받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하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대표작 '포퓰러스(Populous)'를 접하고 나면 그 평가에 수긍하게 된다. 포퓰러스는 단순히 갓 게임의 시초를 넘어, 게임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혁신적인 작품이었다.
포퓰러스, 게임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다
포퓰러스의 가장 큰 혁신은 '실시간' 개념의 도입이었다. 이전의 시뮬레이션 게임 대부분은 플레이어가 행동을 선택하면 컴퓨터가 반응하는 턴(Turn) 기반 방식이었다. 그러나 포퓰러스는 플레이어의 선택과 관계없이 게임 세계가 실시간으로 흘러가고, 플레이어의 결정이 즉각적으로 반영되는 시스템을 선보였다. 이는 엄청난 충격이었고, 게임 플레이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동시대에 등장한 윌 라이트의 '심시티'와 자주 비교되지만, 포퓰러스는 특히 '실시간 전략(RTS)' 장르의 원류로 평가받으며 게임계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마우스로 유닛(사람들)을 간접적으로 지휘하고 환경을 조작하여 상대 세력과 경쟁하는 메커니즘은 이후 등장하는 수많은 RTS 게임의 기본 틀이 되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갓 뷰(God View)' 시점과 직관적인 인터페이스 역시 후대 게임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포퓰러스는 '육성 시뮬레이션'의 원조 격이기도 하다. 플레이어가 신이 되어 직접 개입하기보다 환경을 조성하고 그에 따른 피조물들의 변화를 지켜보는 방식은 '다마고치'나, 절친한 친구이자 경쟁자인 윌 라이트의 '심즈' 같은 게임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최초'라는 타이틀과 후대에 미친 광범위한 영향을 고려할 때, 피터 몰리뉴가 세계 3대 게임 개발자로 불릴 자격은 충분해 보인다. 영국 게임 크리에이터 최초로 대영제국훈장(OBE)을 받은 사실 또한 그의 위상을 뒷받침한다.
개미 관찰 소년, 게임 개발의 길로 들어서다
1960년 영국 길포드에서 장난감 가게 주인의 아들로 태어난 피터 몰리뉴의 어린 시절은 남다른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특히 곤충, 그중에서도 개미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다섯 살 무렵 집 앞마당에서 개미떼를 발견한 후, 그는 막대사탕과 과자로 개미를 유인하고 이동 경로를 파헤쳐 그들의 사회 구조와 여왕개미를 관찰했다. 심술이 나면 개미집을 부수고 그들이 재건하는 과정을 지켜보기도 하고, 때로는 먹이를 주며 그들의 세계가 복구되도록 돕기도 했다. 이 '개미 세계 통치 놀이'를 통해 그는 자신이 마치 신이 된 듯한 느낌과 함께 강력한 힘(주도권)의 매력을 깨달았다. 이 경험은 훗날 갓 게임 탄생의 결정적인 밑거름이 되었다.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는 성격은 다른 일화에서도 드러난다. '퐁(Pong)' 게임에 푹 빠진 그는 결국 할머니 지갑에 손을 대 게임기를 몰래 샀지만, 게임 원리가 궁금해 기계를 분해해 버려 다시는 플레이하지 못했다. 학교생활은 즐겁지 않았고, 그나마 수학을 '덜 싫어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게임 개발자가 될 생각은 해본 적 없지만, 막연히 창의적인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운명적인 착각, 게임 개발사의 탄생
대학 졸업 후, 친구 레스 에드가와 함께 비즈니스 데이터 관리 프로그램을 만드는 회사 '타루스(Taurus)'를 창업했다. 창업 몇 주 후, 아미가 컴퓨터로 유명한 코모도어로부터 프레젠테이션 요청 전화를 받는다. 영문도 모른 채 코모도어 본사를 방문한 몰리뉴는 자신들의 프로그램을 설명했고, 코모도어 관계자들은 깊은 관심을 보이며 아미가 컴퓨터로의 이식과 네트워크 기능 추가를 요청했다. 신생 회사에 대한 과도한 칭찬에 의아함을 느끼던 몰리뉴는 순간, 당시 영국에서 잘나가던 동명의 소프트웨어 대기업 '토루스(Torus)'를 떠올렸다.
코모도어 담당자가 전화번호부에서 실수로 'Torus'가 아닌 'Taurus'에 연락했던 것이다. 코모도어 측은 자신들이 대기업 토루스 사람들과 미팅하고 있다고 착각했고, 몰리뉴는 이 사실을 깨달았지만 차마 밝히지 못했다. 특히 코모도어가 프로그램 완성 시 아미가 컴퓨터 14대를 공짜로 주겠다는 제안을 하자, 그는 신생 회사라는 사실을 숨기고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자신하며 계약을 성사시켰다. 이후 밤낮없이 매달려 생전 처음 해보는 네트워크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납품했고, 약속대로 아미가 컴퓨터 14대와 큰돈을 손에 쥐었다.
이 소식을 들은 친구이자 게임 개발자인 앤드류 베일리가 자신의 게임 '드루이드 2'를 아미가로 이식해달라고 제안했고, 몰리뉴는 이 작업 역시 성공적으로 완수하며 게임 개발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결국 몰리뉴와 레스 에드가는 회사의 업종을 게임 개발로 완전히 전환하고, 회사 이름도 '불프로그(Bullfrog Productions)'로 변경한다. 어이없는 착각에서 시작된 위대한 게임 크리에이터의 탄생 순간이었다.
불프로그의 영광과 한계
불프로그를 창업한 몰리뉴는 세상을 놀라게 할 새로운 게임을 만들고 싶었고, 어린 시절 개미 관찰 경험을 떠올려 '갓 게임' 콘셉트를 구체화했다. 그렇게 탄생한 '포퓰러스'(1989)는 유통사 EA 담당자의 제안으로 정해진 이름이다. 선한 신과 악한 신의 대결을 그린 이 게임은 앞서 설명한 혁신적인 시스템과 게임성으로 전 세계적으로 400만 장 이상 판매되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포퓰러스'의 대성공으로 몰리뉴는 일약 스타 개발자가 되었다. 특히 게임 개발 변방이던 영국에서 세계적인 게임이 탄생하자 영국과 유럽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이후 '파워몽거', '신디케이트', '테마파크', '매직 카펫' 등을 연달아 성공시키며 불프로그는 유럽 최고의 게임 개발사로 성장했다. 1995년(원문 1996년은 오기일 수 있음, 1995년 EA가 불프로그 인수)에는 세계적인 퍼블리셔 EA에 인수되었고, 직원 수는 100명을 넘어섰다.
하지만 회사의 성장은 새로운 고민을 안겨주었다. 1997년 기대작 '던전 키퍼'를 개발할 당시, 몰리뉴는 대규모 개발팀 운영의 한계를 절감했다. '던전 키퍼'는 플레이어가 악당이 되어 영웅을 괴롭힌다는 파격적인 콘셉트였기에 팀원 전체의 깊은 이해가 필요했지만, 100명에 가까운 인원과 소통하고 비전을 공유하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20명 내외의 소규모 팀 시절,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함께 게임을 만들던 즐거움은 사라지고, 기계적인 업무와 비대해진 조직 속에서 그는 창의력의 고갈과 인간적인 소외감을 느꼈다.
그는 '던전 키퍼' 개발 시기를 "게임 개발 인생에서 가장 괴로웠던 때"라고 회상하며, 게임 완성 후 회사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EA에 알렸다. '던전 키퍼'는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는 만족하지 못했다. EA에 주식을 매각하면서 그는 막대한 부를 얻었지만, 창작자로서의 열정은 상처를 입었다.
라이언헤드 스튜디오: 실험 정신과 '과대광고' 논란
EA를 떠난 몰리뉴는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새로운 게임 개발사 '라이언헤드 스튜디오(Lionhead Studios)'를 설립한다. 그는 불프로그 시절의 경험을 교훈 삼아, 한 팀의 핵심 인력을 20명 내외로 제한하여 가족적인 분위기 속에서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게임을 만들겠다는 원칙을 세웠다. 대규모 팀에서는 기존 성공작을 답습하는 경향이 강해지기 쉽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부터 대작을 목표로 하기보다, 다양한 프로토타입을 만들어 가능성을 탐색하는 개발 방식을 추구했다.
라이언헤드의 첫 작품 '블랙 앤 화이트'(2001)는 '포퓰러스'의 갓 게임 장르를 계승하면서도, 플레이어의 행동에 따라 학습하고 성장하는 인공지능 '크리처' 시스템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이는 그의 실험 정신이 빛을 발한 결과였다.
하지만 이후 그의 행보는 '과대광고(Hype)' 논란에 휩싸인다. 특히 야심작 '페이블(Fable)'(2004) 개발 과정에서 그는 "역대 최고의 자유도", "결혼과 육아 가능", "모든 행동이 세상에 영향을 미침", "나무가 실시간으로 자람", "캐릭터 외모의 자연스러운 노화" 등 혁신적인 기능들을 공언했다. 그러나 실제 출시된 게임은 그의 약속에 크게 미치지 못했고, 유저들의 거센 항의 속에 그는 결국 홈페이지에 사과문을 게시하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다.
'페이블'은 플레이어의 선악 선택이 캐릭터 외형과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등 분명 독창적인 시도가 있었고 게임 자체의 재미도 준수했지만, 기대치가 너무 높았던 탓에 실망감 또한 컸다. 이후 영화 스튜디오 경영 게임 '더 무비즈'(2005) 역시 참신한 콘셉트에도 불구하고 초기에는 혹평을 받다가 뒤늦게 재평가받는 등, 라이언헤드의 게임들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이 때문에 한때 그가 "하락세에 접어들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창조력과 실험 정신 자체가 퇴색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는 익숙한 성공 공식에 안주하기보다 끊임없이 새로운 재미를 탐구하려 했고, 그 결과물들은 비록 완성도나 대중성 면에서 논란이 있었을지언정 항상 게임계에 신선한 화두를 던졌다. (라이언헤드는 2006년 마이크로소프트에 인수되었고, 몰리뉴는 2012년 퇴사 후 22cans라는 새로운 스튜디오를 설립하여 '큐리오시티', '갓어스' 등을 개발하며 여전히 논란과 기대를 동시에 받고 있다.)
게임 철학과 산업에 대한 기여
피터 몰리뉴는 게임 크리에이터라는 직업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게임 개발을 위해서는 게임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열정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게임 하나를 만드는 데 3년 이상 걸리고, 주 100시간 이상 일하는 경우도 허다하기에 열정 없이는 버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게임 디자이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며, 특히 유저가 게임을 어떻게 경험할지를 명확하게 상상하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화려한 그래픽보다는 게임 플레이 자체가 핵심이며, 자신의 아이디어를 다른 사람에게 매력적으로 설득하는 능력 또한 크리에이터의 중요한 자질이라고 본다. 이를 위해서는 스스로의 아이디어에 대한 확신과 열정이 필수적이다. 또한 그는 유저가 매뉴얼 없이도 쉽게 이해하고 즐길 수 있는 직관적인 게임 디자인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윌 라이트와 함께 게임계의 대표적인 독서광으로 꼽히는 그는 톨킨 같은 소설가뿐 아니라 스티븐 스필버그 같은 영화감독에게서도 많은 영감을 얻는다. 최고의 게임 크리에이터로는 미야모토 시게루를 꼽으며 '마리오'와 '젤다의 전설'을 극찬한다.
단순히 자신의 회사만 생각하는 개발자가 아니라, 유럽 게임 산업 전체의 발전을 고민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개발사의 투자 유치 방식 등에 대한 강연을 하고, GDC 같은 국제 행사에서 자신의 노하우를 공유하는 데 적극적이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영국 왕실로부터 대영제국훈장(OBE)을 받았다. 후배 개발자들에게 투자하며 영국 게임 산업 발전에 기여하려는 책임감 또한 보여준다.
수많은 혁신과 성공, 그리고 때로는 논란을 일으키는 과감한 약속으로 게임계에 깊은 족적을 남긴 피터 몰리뉴. 그는 여전히 새로운 아이디어를 탐구하며 게임의 가능성을 넓히려는 도전을 멈추지 않고 있다.
주요 대표작
1989년 파퓰러스 (Populous)
1993년 신디게이트 (Syndicate)
1994년 테마 파크 (Theme Park)
1997년 던전 키퍼 (Dungeon Keeper)
2001년 블랙 앤 화이트 (Black & White)
2004년 페이블 (Fable)
2005년 더 무비즈 (The Movies)
2008년 페이블 2 (Fable II)
2010년 페이블 3 (Fable III)
2013년 갓어스 (Godus) (22ca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