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의 신, 미야모토 시게루 1부: 마리오와 젤다의 전설로 닌텐도를 구한 괴짜 디자이너
미야모토 시게루는 단순히 닌텐도의 성공에 공헌한 인물이 아니다. 그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비디오 게임의 기본 문법을 창조한 사람이다. 음악이 존재하는 한 모차르트를 이야기하듯, 게임이 존재하는 한 미야모토 시게루는 그 업적을 영원히 칭송받을 것이다. 그의 놀라운 점 중 하나는 1952년생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장에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새로운 상품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는 사실이다. 그의 삶은 인간의 창의성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에 대한 훌륭한 교훈을 준다.
미야모토 시게루는 1952년 11월 16일, 교토 외곽의 작은 시골 마을 소노베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공부보다는 친구들과 함께 산과 들을 마음껏 뛰어놀며 시간을 보냈다. 비디오 게임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정작 그의 유년기에는 텔레비전조차 흔치 않았다. 그가 누린 유일한 문화생활은 아버지를 따라 몇 달에 한 번씩 도시에 가서 보았던 《백설공주》나 《피터팬》 같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전부였다.
어린 미야모토는 칭찬에 유난히 고무되는 순수한 면이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그린 그림을 선생님이 칭찬하자 그는 그림의 세계에 푹 빠져들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강가나 공원으로 나가 그림을 그렸다. 중학교 시절에는 미술부원보다 잘 그린다는 칭찬을 듣고 직접 만화부를 결성했으며, 《아톰》으로 유명한 테즈카 오사무처럼 세상을 감동시키는 만화가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고등학생이 되자 프로 만화가가 되기에는 자신의 실력이 부족하다는 현실을 깨닫고 꿈을 접었다. 이때 그는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어린 시절부터 만화에만 몰두했던 탓에 학업 성적은 좋지 않았고, 대학 진학이 걱정이었다. 다행히 유일하게 수학 성적은 좋았는데, 그는 자신의 그림 실력과 수학적 재능을 함께 활용할 수 있는 분야를 찾기 시작했다. 오랜 고민 끝에 찾아낸 학과는 공업디자인학과였고, 마침내 카나자와 미술대학에 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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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기 좋아하고 다른 과목 성적은 좋지 않았던 미야모토 시게루가 유독 수학만큼은 잘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디지털 시대에 필요한 중요한 능력 중 하나가 바로 수학적 사고력이기 때문이다.
성공한 IT 거장들은 대부분 수학에 능통했다. 빌 게이츠는 어린 시절부터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학교 선생님이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바로 지적해서 때로는 선생님의 기분을 상하게 할 정도였다. 그는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할 만큼 수학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수학 실력이라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구글 창업자 세르게이 브린이다. 수학과 교수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그는 어린 시절부터 출중한 수학 실력을 자랑했다. 그 역시 빌 게이츠처럼 선생님의 실수를 지적하지 않고는 넘어가지 못했다. 나중에는 그를 전담으로 가르칠 수학 선생님이 따로 배정될 정도였다.
야후의 창업자 제리 양에게 수학은 힘겨운 시절을 이겨내는 버팀목이었다. 대만에서 이민 온 그는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해 학교에서 늘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었다. 하지만 수학 시간만큼은 달랐다. 뛰어난 수학 실력을 발휘하며 그는 잠시나마 위축된 마음을 펴고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세상의 이치를 수학적으로 풀어가는 물리학을 공부했고,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역시 수학과 밀접한 경제학을 전공했다.
IT 기업들은 직원을 채용할 때 수학 실력을 중요하게 평가한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컴퓨터를 전혀 다루지 못해도 수학 실력만 뛰어나면 채용하기도 한다. 수학을 잘하는 사람에게 컴퓨터를 가르치면 금방 실력이 향상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구글은 한때 회사 앞에 어려운 수학 문제를 게시하고, 이를 푸는 사람에게는 즉시 채용 기회와 상금을 제공하기도 했다. 미야모토 시게루가 수학에 재능을 보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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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영혼, 닌텐도에 입사하다
미야모토 시게루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묻는 질문에 대학교 합격 당시라고 답할 만큼 대학 시절을 소중하게 여긴다. 그 이유는 바로 '자유' 때문이었다. 그는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 공부는 뒷전으로 미루고 학교 밖으로 놀러 다니기 바빴다. 특히 음악에 심취해 밴드를 결성하고 기타리스트로 활동했으며, 한때는 프로 음악가를 꿈꿀 정도로 음악에 깊이 빠져들었다.
하지만 잦은 음악 활동으로 수업을 자주 빠지면서 결국 출석 일수 부족으로 유급을 당하고 만다. 고향으로 돌아온 아들을 본 부모님은 불같이 화를 내면서도 제발 대학만은 졸업해 달라고 눈물로 애원했다. 부모님의 간절한 부탁에 정신을 차린 그는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 학업에 매진했고, 입학한 지 5년 만에 겨우 졸업장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대학을 졸업했지만, 그에게는 뚜렷하게 하고 싶은 일이 없었다. 어린 시절 NHK에서 인기리에 방영되던 인형극을 떠올리며 연출가를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졸업할 무렵에는 인형극의 인기가 시들해져 관련 업계 종사자들은 생계조차 어려웠다.
그는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평범한 회사원 생활은 원치 않았다. 남들이 만들 수 없는 것을 만들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일반적인 기업보다는 자신의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회사를 찾았다. 마침 당시 일본에서는 닌텐도가 만든 장난감 '광선총'이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아버지의 친구 중 지방자치단체 의원이 있었는데, 그가 닌텐도의 사장 야마우치 히로시와 절친한 사이였다. 미야모토는 아버지에게 부탁해 닌텐도에서 면접 볼 기회를 얻었고, 운 좋게 야마우치 사장을 만나게 되었다.
처음 미야모토를 본 야마우치는 회사에 더 이상 그림 그리는 디자이너는 필요 없다고 잘라 말했다. 하지만 며칠 안에 뭔가 새로운 것을 한번 만들어 와보라고 제안했다. 며칠 후, 미야모토는 아이들을 위한 몇 가지 장난감 아이디어와 그림들을 가지고 다시 찾아갔다. 그중에서도 코끼리 코 모양을 형상화한 옷걸이는 키 작은 아이들도 쉽게 옷장에 옷을 걸 수 있도록 배려한 디자인이 돋보였다. 야마우치는 미야모토가 가져온 결과물들이 마음에 들었는지, 처음과는 달리 그를 채용하기로 결정했다.
막상 입사한 닌텐도는 미야모토의 생각과 여러모로 달랐다. 화투와 트럼프로 유명하고 각종 장난감도 인기가 있었기에 겉보기에는 자금이 튼튼한 회사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상은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었다. 그럼에도 미야모토는 즐겁게 일을 시작했다. 원래부터 남들과 다른 일을 하고 싶었는데, 야마우치 사장이 그를 볼 때마다 "뭔가 새로운 걸 만들어 보라"고 독려했기 때문이다.
미야모토는 당시 닌텐도 직원 중 유일한 공업디자인학과 졸업생이었다. 그래서 여러 부서에서 그에게 그림을 그려달라고 요청했고, 그는 온갖 잡무에 시달려야 했다. 각종 인쇄물과 상품 패키지를 디자인했고, <레이더 스코프>나 <스페이스 파이어버드> 같은 초기 게임의 그래픽 작업도 담당했다. 직원들 사이에서 그는 그림 잘 그리는 '만능 기획 사원'으로 통했다.
하지만 그는 원래부터 성실하게 일하기보다는 다소 게으르고 놀기 좋아하는 편이었다. 청바지에 카우보이 부츠를 신고 긴 머리를 한 채 회사에 출근하는 등, 그는 여러 면에서 회사 내 괴짜로 통했다. 화투나 트럼프 속 그림을 그릴 때는 엉뚱하게 괴상한 곤충을 그려 넣기도 했다. 입사 초기만 해도 그는 게임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고, 게임 개발자가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고, <팩맨>이 등장하자 '훌륭한 게임 기획자가 되어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동키콩, 닌텐도를 구하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 내에서 게임 아이디어를 공모한다는 공고가 붙었다. 야심 차게 출시했던 아케이드 게임 <레이더 스코프>가 미국 시장에서 참패하면서 닌텐도는 심각한 재정 위기에 몰렸다. 이 위기를 돌파할 방법은 오직 남들과 다른 독창적인 게임을 개발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한 야마우치 사장이 전 직원을 대상으로 아이디어 공모를 실시한 것이다.
미야모토는 자신의 아이디어가 채택될 것이라는 강한 자신감을 가지고 공모전에 참여했다. 그는 네 가지 아이디어를 제출했는데, 당시 사내 공모전을 주관하던 개발부의 실력자 요코이 군페이는 그의 아이디어 모두를 마음에 들어 했다. 요코이는 미야모토의 재능을 즉시 알아보고 그의 적극적인 후견인이 되어주었다.
공모전 당선 후, 야마우치 사장은 미야모토에게 "무조건 새롭고 신선한 게임을 만들어야 한다"는 특명을 내렸다. 미야모토는 이것이야말로 자기 인생 최대의 기회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는 가까운 친구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앞으로 일 때문에 바빠질 테니 술 먹자고 부르지 말라"고 당부하기까지 했다.
3개월간의 고된 작업 끝에 미야모토는 마침내 <동키콩>을 완성했다. 이 게임은 미국과 일본에서 엄청난 히트를 기록하며 위기에 처한 닌텐도를 구원했다. <동키콩>의 성공으로 미야모토는 자신의 잠재된 능력을 발견했고, 게임 개발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패미컴, 운명을 건 도박
야마우치 히로시는 실패하면 과감히 포기하고 새로운 사업으로 눈을 돌렸지만, 한번 성공을 거두면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더욱 집요하게 파고드는 경영자였다. <동키콩>의 성공을 지켜보면서 그는 다시 한번 회사의 운명을 건 과감한 도전을 계획했다. 바로 가정용 게임기 시장 진출이었다.
야마우치는 직원들에게 아이들이 설날에 받는 평균 세뱃돈을 고려하여 1만 엔 이하로 게임기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직원들은 터무니없는 가격 목표를 맞추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고, 결국 14,800엔에 '패밀리 컴퓨터', 즉 패미컴을 출시할 수 있었다. 제작 단계부터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원가 절감 노력 덕분에 패미컴은 가격 대비 성능이 매우 뛰어났다. 당시 '알카디아'라는 게임기로 시장에 진출했던 경쟁사 반다이는 패미컴의 가격을 보고 크게 놀랐다고 한다. 반다이가 패미컴 수준의 성능으로 게임기를 만들었다면 가격이 3만 엔을 훌쩍 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성능 게임기를 저렴한 가격에 실현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야마우치의 '도박'에 가까운 결단 덕분이었다. 게임기의 핵심 부품인 CPU를 IT 기업 리코로부터 납품받으려 했는데, 예상보다 가격이 너무 비쌌다. 닌텐도가 가격 인하를 요구하자 리코는 대량으로 구매하면 가격을 낮춰주겠다고 제안했다. 컴퓨터 부품은 연구 개발과 생산 설비 투자 비용이 크기 때문에 대량 생산할수록 단가가 극적으로 떨어진다. 야마우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무려 150만 개의 CPU를 선주문했다. 이 결정은 리코뿐만 아니라 닌텐도 내부 관계자들까지 깜짝 놀라게 했다. 만약 패미컴이 실패한다면 회사는 파산할 수밖에 없는 엄청난 위험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야마우치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가지 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사내의 모든 개발팀에게 당시 회사의 중요한 수익 사업이었던 오락실용 게임 개발을 전면 중단하고, 오직 패미컴용 게임 개발에만 집중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이 결정은 사내에서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심지어 <동키콩>을 성공시킨 미야모토 시게루마저도 당시 야마우치의 판단이 너무 무모하다고 느꼈을 정도였다.
소프트웨어의 힘: 미야모토에게 달린 닌텐도의 미래
그런데 야마우치가 회사를 파산으로 몰고 갈 수도 있는 위험한 도전을 감행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미야모토 시게루였다. 야마우치는 <동키콩>의 성공 이후 소프트웨어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동키콩>은 아케이드 버전뿐만 아니라 콜레코비전이나 아타리 2600 같은 다른 가정용 게임기로도 이식되었는데, 이식될 때마다 해당 게임기의 판매량도 덩달아 늘어났기 때문이다. 야마우치는 미야모토 시게루가 <동키콩> 같은 훌륭한 게임을 계속 만들 수 있다면, 하드웨어 경쟁에서도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다. 결국, 가정용 게임기 개발에 회사의 사활을 건 야마우치의 도박에서 그 운명은 소프트웨어를 책임질 미야모토 시게루의 손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평사원에서 갑자기 닌텐도의 운명을 좌우하게 된 미야모토는 게임 개발의 영감을 자신의 어린 시절 즐거웠던 추억에서 찾기로 했다. 그는 고향 소노베의 산과 들을 마음껏 뛰어다녔던 즐거운 경험을 게임으로 재현한다면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상품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게임 역사를 새로 쓰다
미야모토는 새로운 게임의 핵심 콘셉트를 '점프의 상쾌함'으로 정하고, 캐릭터의 움직임에 따라 화면도 함께 움직이는 방식을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이 아이디어는 세계 최초로 화면이 좌우로 흐르는 '사이드 스크롤'이라는 장르로 구체화되었다. 하지만 미야모토를 제외한 다른 개발자들은 단순히 좌우로만 움직이고 마리오가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라고는 점프밖에 없다는 사실에 불만을 터뜨렸다. 미야모토는 "막상 게임이 완성되면 분명 재미있을 것"이라며 개발자들을 설득했다.
사이드 스크롤은 지금 보면 너무나 당연한 기술이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아이디어였고 수많은 개발자의 땀과 노력이 필요했다. 화면이 계속 움직인다는 것은 배경으로 사용될 그림 데이터가 훨씬 많이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당시 게임기의 데이터 저장 용량은 매우 작았기 때문에 많은 그림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구름으로 사용된 그래픽의 색깔만 초록색으로 바꿔서 수풀로 재활용하는 등 여러 가지 기발한 방법들이 동원되었다.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미야모토가 어린 시절 재미있게 읽었던 루이스 캐럴의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 버섯을 먹으면 마리오의 몸이 커진다는 아이디어 역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가 케이크를 먹고 몸이 커지는 장면에서 착안한 것이다. 원래 기획 단계에서는 마리오의 기본 크기가 컸다. 마리오가 커야 박진감도 넘치고 달리는 기분이 더 잘 느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개발 과정에서 우연히 마리오의 하체가 사라지고 상체만 나타나는 프로그래밍 오류가 발생했다. 프로그래머들은 당황하며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썼지만, 그 순간 미야모토의 머릿속에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게임을 시작할 때는 작은 크기의 마리오로 등장하지만, 버섯 아이템을 먹으면 크기가 커지도록 만드는 것이다. 프로그래머의 작은 실수가 오히려 게임의 중요한 특징으로 발전한 '전화위복'의 순간이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가 거울을 통해 신세계로 들어가듯, 마리오 역시 파이프라인 안으로 들어가면 지하 세계로 연결된다. 이 파이프라인 설정 역시 미야모토의 어린 시절 경험에서 비롯된 아이디어다. 그가 자랐던 동네에는 지상에서 지하로 연결되는 파이프라인이 있었다. 그는 그것을 볼 때마다 '저 파이프라인 안으로 들어가면 무슨 일이 생길까?' 하고 상상하곤 했는데, 그때의 추억을 게임 속에 재현한 것이다. 게임 속에 파이프라인이 자주 등장하면서 마리오의 직업도 원래 설정이었던 목수에서 배관공으로 바뀌게 되었다. 파이프라인이 지하 비밀 통로와 연결된다는 아이디어는 과거 미야모토가 다락방에서 친구들과 비밀 암호를 주고받으며 놀았던 기억에서 영감을 얻었다.
게임 개발은 기획, 그래픽, 프로그래밍 작업으로 끝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플레이어가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게임의 '밸런스'를 맞추는 작업이 매우 중요하다. 마리오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달려야 하는지, 점프는 얼마나 높이 뛸 수 있어야 하는지 등을 결정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게임을 수천 번 반복해서 플레이하며 세밀하게 조정해야 한다. 미야모토는 화면 상의 점 하나 차이까지 교정해 가면서 게임 밸런스를 완벽하게 다듬었다.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발매 직전, 미야모토는 엄청난 압박감에 시달렸다. 당시 닌텐도는 패미컴의 성공에 모든 것을 걸었기 때문에, 만약 게임기가 실패한다면 회사는 다시 암흑기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는 미야모토에게 큰 스트레스로 작용했고, 발매일이 다가올수록 초조함은 더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늦게까지 일하고 퇴근하던 미야모토는 마침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게임 팩을 생산하는 공장에 아직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그곳으로 향했다. 그런데 한창 일해야 할 시간에 직원들이 큰 소리로 웃고 떠들고 있었다. 궁금해서 다가가 보니, 직원들이 옹기종기 모여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를 플레이하며 즐거워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을 본 미야모토는 게임의 성공을 확신하게 되었다.
실제로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는 발매 직후 폭발적인 판매량을 기록하며 패미컴의 성공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사회 현상까지 일으킨 이 게임은 전 세계적으로 4천만 장 이상 판매되며 당시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비디오 게임으로 등극했다. (이 기록은 훗날 <Wii 스포츠>에 의해 깨진다.)
젤다의 전설: 탐험의 즐거움을 담다
미야모토 시게루는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개발에만 몰두했던 것이 아니다. 동시에 '젤다의 전설'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액션 어드벤처 게임도 함께 개발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동시에 진행하던 두 개의 게임이 모두 실패했다면, 닌텐도는 정말로 화투 회사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야모토는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만큼은 아니었지만, <젤다의 전설> 역시 성공시켰다.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가 상업적인 성공으로 미야모토에게 최고의 명성을 안겨주었다면, <젤다의 전설>은 뛰어난 작품성으로 그에게 또 다른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해주었다. 기존의 게임들이 주로 단순한 액션의 반복이었다면, <젤다의 전설>은 마치 한 편의 소설처럼 장대한 스토리를 담아내며 게임도 예술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젤다의 전설> 역시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처럼 미야모토의 어린 시절 즐거웠던 추억이 게임으로 되살아난 작품이다. 이번에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피터팬>이 게임에 깊은 영감을 주었다. 게임의 그래픽 배경이나 주인공 링크의 외형 등에는 피터팬의 이미지가 곳곳에 녹아 있다.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가 '점프의 상쾌함'을 담아냈다면, <젤다의 전설>은 '탐험의 짜릿함'을 표현했다. 어린 시절 미야모토는 그가 자란 소노베에 있는 보리산에 올라가 놀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평소 가지 않던 산속 깊은 곳을 탐험하다가 예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길과 장소를 발견하면서 묘한 성취감을 느꼈다. 또한 동굴 깊숙한 곳까지 탐험할 때 느꼈던 흥분감 역시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었다.
인간의 모험심을 자극하는 스토리와 흥미진진한 탐험 요소로 가득 찬 <젤다의 전설>이었지만, 처음 게임이 완성되었을 때는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때처럼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젤다의 전설>에는 액션, 어드벤처, 퍼즐, 롤플레잉 등 다양한 장르의 요소가 결합되어 있었는데, 이러한 복합적인 형식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너무 낯설고 어렵게 느껴질 것이라는 우려가 많았다. 게임이 너무 어려워서 시장에서 성공하기 힘들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도 쏟아졌다.
하지만 <젤다의 전설>은 그러한 우려를 비웃듯 65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했으며, 이후 출시된 시리즈 전체 판매량은 5,200만 장을 돌파하며 초히트 게임 프랜차이즈로 자리 잡았다.
마리오 시리즈가 게임을 처음 접하는 캐주얼 유저들에게 큰 사랑을 받는다면, 젤다의 전설은 게임 마니아들에게 특히 인기가 높다. 닌텐도는 이 두 작품을 통해 서로 다른 취향을 가진 두 부류의 고객들을 모두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슈퍼 마리오와 젤다의 전설의 연이은 성공 이후, 미야모토 시게루는 '게임의 신'이라는 칭호까지 얻으며 명실상부 업계 최고의 크리에이터 반열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