둠과 퀘이크로 3D게임의 혁명을 일으킨 존카멕 이야기



3D 게임의 혁명가, 존 카멕: 코드, 시대를 바꾸다

"한 가지 일에 열심히 하는 것은 성공을 위한 가장 실질적인 방법이다. 오직 목표에만 초점을 맞춰라. 그리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다음 발걸음을 내딛어라. 만약 지금 네가 하고 있는 길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다른 길도 함께 가보고 더 나은 것이 어떤 것인지 찾아내라." - 존 카멕

존 카멕은 천재라는 말 외에는 표현하기 힘든, 역사상 최고의 게임 프로그래머 중 한 명이다. 그는 게임계에 FPS(1인칭 슈팅 게임) 장르를 창조했을 뿐 아니라, 압도적인 3D 기술력으로 게임 프로그래밍 전반에 혁명을 일으켰다.

컴퓨터, 천재 소년의 세계를 열다

1970년생인 존 카멕은 어린 시절부터 비범함을 보였다. 말은 늦게 배웠지만, 초등학교 입학 후 뛰어난 학습 능력을 발휘했다. 학교 시험 만점은 기본이었고, 중학교 1학년 때 이미 중학교 3학년 과정을 모두 이해했다. 자신만의 독특한 기호 언어 체계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스스로 남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알았기에,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관심사의 차이가 컸기 때문이다.

그의 운명은 12살, 애플 II 컴퓨터를 처음 만난 순간 결정되었다.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는 순간, 그는 세상에 오직 자신과 컴퓨터만 존재하는 것처럼 몰입했다. 이사를 가면 가장 먼저 컴퓨터 전원을 연결할 정도로 컴퓨터는 그의 삶의 중심이 되었다. 혼자 프로그래밍을 공부하며 그는 곧 학교 선생님의 수준을 뛰어넘었다. 결국 선생님의 권유로 캔자스주 최고의 컴퓨터 명문고인 샤니미션 이스트 고등학교로 전학했다.

존 카멕의 고등학교 시절은 만화, 컴퓨터, '반지의 제왕', '던전 앤 드래곤', 그리고 게임, 이 다섯 가지 키워드로 요약된다. 특히 리처드 개리엇의 '울티마'를 플레이하며 깊은 감명을 받고 게임 개발자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남들과 다른 점은, "내가 만들면 훨씬 더 잘 만들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에서 출발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미 고등학생 때부터 직접 게임을 개발하고 다른 게임을 개조했으며, 프로그래밍 아르바이트로 원하는 컴퓨터를 살 만큼 충분한 돈을 벌었다.

정해진 길을 거부하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컴퓨터에만 몰두하는 것을 걱정했다. 아들의 뛰어난 재능을 알았기에, 명문 대학에 진학해 정규 교육을 받기를 간절히 바랐다. 결국 존 카멕은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에 못 이겨 프로그래밍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미주리-캔자스 시티 대학(UMKC)에 진학한다.

그러나 대학은 천재에게 답답한 공간이었다. 창조적인 작업을 갈망하는 그에게, 이미 낡은 지식을 반복하는 대학 수업은 의미가 없었다. 교수들에게 배울 것이 없다고 판단한 그는 대학교 2학년 때 자퇴를 결심한다. 스스로 "최악의 2년"이라고 회상하는 대학 생활을 끝낸 그는 피자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틈틈이 소프트웨어 회사들의 외주 프로그램을 개발해주었다.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외주 작업만으로도 큰돈을 벌 수 있었다. 주말 동안 간단히 개발하고 받는 돈이 천 달러에서 천오백 달러에 달했지만, 그는 돈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원하는 컴퓨터를 살 정도면 충분했다. 그래서 피자 가게 일을 계속하며 필요할 때만 프로그래밍 외주를 받았다.

그의 뛰어난 프로그래밍 실력은 업계에서 금방 소문이 났다. 수많은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쏟아졌지만, 그는 자유로운 프리랜서 생활을 선호했다.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억지로 인간관계를 맺어야 하는 회사 생활은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원하는 시간에 자유롭게 하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운명적 만남과 Id 소프트웨어의 태동

모든 취업 제의를 거절하던 존 카멕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존 로메오와의 만남이었다. 로메오는 이미 게임계에서 뛰어난 실력으로 인정받는 프로그래머였다. 카멕은 처음으로 자신이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사람이라고 느꼈고, 로메오의 동업 제안을 받아들인다.

당시 존 로메오는 소프트디스크(Softdisk)라는 회사에서 게임 개발 총괄을 맡고 있었다. 소프트디스크는 매달 잡지와 함께 각종 프로그램과 게임을 번들로 제공하는 회사였다. 함께 일하게 된 카멕과 로메오는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며 빠른 속도로 많은 게임을 개발했고, 회사에 큰 수익을 안겨주었다. 그들은 회사 내 전용 사무 공간과 많은 신임을 얻었다. 인센티브로 받은 돈은 냉장고, 오디오, 소파, 최신 컴퓨터 등을 사는 데 썼고, 그들의 사무실은 다른 팀의 부러움과 질시를 살 정도로 호화로워졌다.

하지만 두 사람은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실제로 회사를 먹여 살리는 것은 그들이 이끄는 게임 개발팀이었기에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존 카멕이 주말에 장난삼아 만든 횡스크롤 액션 게임이 그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다. 당시 최고 인기 게임이던 닌텐도의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3'를 PC 환경에서 거의 완벽하게 구현해낸 것이다. 이는 당시 PC 하드웨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획기적인 그래픽 기술이었다.

존 로메오는 즉시 이 게임의 가능성을 직감했다. 그는 몇몇 동료들을 비밀리에 모아 이 기술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게임 개발을 시작하고, 닌텐도에 PC 버전 컨버전을 제안하기로 한다. 주말을 이용해 몰래 게임을 개발하여 미국 닌텐도 지사에 보냈지만, "PC용 게임은 개발하지 않는다"는 실망스러운 답변만 돌아왔다.

이 기술을 그냥 썩히기 아까웠던 로메오는 평소 자신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하던 아포지(Apogee, 현 3D Realms)사에 게임을 보여준다. 인터넷 기반의 셰어웨어 방식으로 게임을 유통하던 아포지사는 게임의 기술력에 충격을 받고 성공을 확신했다. 이렇게 비밀리에 개발된 게임이 바로 훗날 큰 성공을 거두는 '코맨더 킨(Commander Keen)'이다. '코맨더 킨'은 셰어웨어라는 새로운 판매 방식으로도 주목받았다. 게임의 일부(주로 첫 에피소드)를 무료로 배포하고, 전체 게임을 원하는 사용자는 비용을 지불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아마추어 개발자들이 유통사를 거치지 않고 자체적으로 게임을 판매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코맨더 킨'은 인터넷에 공개되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게임을 구매한 유저는 전체 이용자의 3%에 불과했지만, 몇 달 만에 15만 달러라는 거금을 벌어들였다. 이는 그들이 소프트디스크에서 독립하여 회사를 창업하기에 충분한 자금이었다. 존 로메오는 존 카멕, 탐 홀, 애드리안 카멕 등 핵심 개발자들을 모아 게임 개발사 창업을 제안했다. 성공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소프트디스크는 핵심 인력들을 쉽게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사장은 제발 나가지 말라며 통사정했지만, 결국 몇 개의 게임을 독점 개발해준다는 조건으로 그들은 회사를 나올 수 있었다. 이렇게 1991년 탄생한 회사가 바로 전설적인 게임 개발사, Id 소프트웨어(id Software)다. (회사명 'Id'는 'Ideas from the Deep'의 약자이다.)

FPS의 탄생과 3D 혁명




Id 소프트웨어를 창업한 존 카멕과 동료들은 넉넉하지 않은 환경에서 시작했다. 외곽의 작은 사무실에서 출발한, 그들 표현으로 "역사상 가장 춥고 배고픈 시절"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행복했던 추억으로 남아있다. 창업 멤버들은 모두 '던전 앤 드래곤' 마니아였고, 틈날 때마다 피자를 시켜놓고 TRPG를 즐기며 유대감을 다졌다.

초기에는 안정적인 수익을 위해 '코맨더 킨' 시리즈를 6편까지 개발했다. 하지만 존 카멕의 관심은 이미 3D 그래픽으로 향해 있었다. 그는 2D 액션 게임의 한계를 느끼고 획기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3D 기술을 게임에 본격적으로 도입하자는 그의 제안에 리더 존 로메오를 포함한 팀원 모두가 동의했다.

그 결과물이 1991년에 나온 '호버탱크 원(Hovertank One)'과 '카타콤 3D(Catacomb 3D)'였다. 유통 파트너였던 아포지의 CEO 스캇 밀러는 이 게임들에서 새로운 장르의 가능성을 보았지만, 시장의 반응은 미미했다. 하지만 이 두 게임의 개발 과정에서 존 카멕의 3D 프로그래밍 실력은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1인칭 슈팅 게임(FPS)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카멕은 자신의 능력을 집대성하여 다시 한번 FPS 개발에 도전했다. 팀원들은 기존 게임의 실패 원인이 조악한 그래픽과 기획력 부족에 있다고 판단하고, 매력적인 세계관 구축에 집중했다. 처음에는 생체 실험 연구소 탈출을 구상했지만, 존 로메오는 1981년 작 2D 액션 게임 '캐슬 울펜슈타인(Castle Wolfenstein)'에서 영감을 얻었다. 나치의 본거지 울펜슈타인 성에 잠입하는 설정을 3D로 리메이크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원작 개발사인 뮤즈 소프트웨어는 이미 파산한 상태라 판권 확보는 어렵지 않았다.

게임 개발이 본격화되자, Id 소프트웨어 직원들은 이 게임이 이전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들은 대형 유통사와 쉽게 계약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당시 최대 유통사 중 하나인 시에라 온라인의 CEO 켄 윌리엄스가 직접 사무실을 방문했다. 시에라 직원들은 게임의 기술력에 경탄했지만, 노련한 협상가인 윌리엄스는 별다른 표정 없이 2만 5천 달러라는 낮은 계약금을 제시했다.

실망한 로메오는 다시 아포지의 스캇 밀러에게 연락했다. 밀러는 '울펜슈타인 3D'를 보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파격적인 조건과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결국 Id 소프트웨어는 아포지와 손잡고 1992년 게임을 출시한다.

'울펜슈타인 3D'는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직원들이 업무 시간에 게임만 한다"는 사장들의 하소연이 빗발쳤고, 마이크로소프트 직원이 "회사 사람들이 하도 많이 해서 게임 사운드 환청까지 들렸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 게임은 비록 완전한 3D는 아니었지만, 1인칭 시점에서 적을 쏘는 FPS의 기본 틀(아이템 체계, 길 찾기 미션 등)을 완성하며 새로운 장르의 탄생을 알렸다.

게임 역사를 바꾼 둠(DOOM)과 퀘이크(Quake)




'울펜슈타인 3D'의 성공에도 존 카멕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그는 더욱 강력한 기술로 무장한 차기작을 준비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게임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게임 중 하나로 꼽히는 '둠(DOOM)'이다. (둠이라는 제목은 영화 '컬러 오브 머니'에서 톰 크루즈의 대사에서 영감을 얻었다.)

'둠'은 기술적으로 3D 엔진에 혁신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네트워크 플레이를 도입하여 게임의 재미를 확장했다. '데스매치(Deathmatch)'로 불린 이 시스템은 원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연결해 실시간 대결을 펼치는 신기원을 열었다.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와 배우 로빈 윌리엄스가 매일 네트워크로 '둠' 대결을 벌인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데스매치는 훗날 블리자드의 '배틀넷' 같은 로비 기반 온라인 매치메이킹 시스템으로 발전했고, 대규모 온라인 게임의 기술적 토대가 되었다. '둠' 개발은 아이디어가 아닌, 존 카멕의 기술력이 먼저였다. "카멕의 기술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며 게임 시스템이 구체화되었다.

'둠'의 성공으로 Id 소프트웨어는 최고의 개발사로 인정받았고, 창업자들은 백만장자가 되었다. 존 카멕 자신도 페라리를 구입할 정도의 부를 얻었지만, 여전히 반바지에 긴 머리를 하고 피자와 콜라를 먹으며 개발에 몰두했다. 감옥에 있는 친구에게 10만 달러를 보내고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등 돈에 무관심한 모습과 자유분방한 생활 방식은 그를 록스타 같은 존재로 만들었다.

'둠' 이후 존 카멕은 게임 산업에 또 다른 충격을 안겼다. 바로 자신이 개발한 게임 엔진의 소스 코드를 모두 공개한 것이다. 이는 당시 업계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그는 기술 독점을 경계하고 정보 공유를 중시하는 해커 정신(GNU 정신)의 실천가였다. 둠 엔진과 소스 공개는 전 세계 3D 게임 개발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수많은 프로그래머가 그의 코드를 보며 3D 기술에 눈떴고, 그는 프로그래머들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는 자신의 기술을 특허로 등록하지도 않았다. 만약 그가 3D 엔진 기술 특허를 등록했다면 막대한 로열티 수입을 얻었겠지만, 기술 발전은 더뎠을 것이다. 그의 신념과 행동 덕분에 다른 게임사들도 함부로 기술 특허를 내세우기 어려워졌고, 이는 결과적으로 3D 게임 기술의 빠른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그는 '둠'의 엔진과 함께 게임 개발 툴(MOD 툴)을 공개하여 MOD(Modification: 변형) 문화를 촉발했다. 이 툴을 이용하면 누구나 게임 캐릭터, 아이템, 배경, 스테이지 등을 자유롭게 수정하여 자신만의 게임을 만들 수 있었다. 이는 아마추어 개발자들의 창작 욕구를 자극하고 실력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 MOD 게임 제작을 통해 실력을 인정받아 프로 개발자로 스카우트되는 사례가 속출했다. 최고의 FPS 게임 중 하나인 '하프라이프' 개발팀이나 '배틀필드' 시리즈 제작진 중 상당수가 둠 MOD 제작자 출신이다.

카멕의 업적은 1996년 발매된 '퀘이크(Quake)'에서 집대성되었다. '퀘이크'는 화면상의 모든 요소를 3D로 구현한, 진정한 의미의 풀(Full) 3D 게임 시대를 열었다. 최대 32명이 동시에 데스매치를 즐길 수 있게 되면서 네트워크 게임 붐을 다시 한번 일으켰고, 더욱 쉬워진 MOD 툴은 더 많은 아마추어 개발자들을 끌어들였다. 그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퀘이크의 소스 코드를 공개하며 프로그래머들의 찬사를 받았다.

'퀘이크'는 게임 엔진 라이선스 판매라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Id 소프트웨어는 퀘이크 엔진을 사용하여 상용 게임을 만들 경우 로열티를 받는 방식으로 수익을 창출했다. 이는 게임 개발사, 특히 자본과 기술력이 부족한 중소 개발사들에게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검증된 엔진을 사용함으로써 개발 기간을 단축하고 기술적 실패 위험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엔진 구매 회사가 Id 소프트웨어보다 질 낮은 게임만 만들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존 카멕은 주로 엔진의 기술력을 선보이는 데 집중하여 게임을 개발했고, 이는 다른 회사들이 엔진을 활용해 시나리오, 캐릭터, 게임성에 집중하여 차별화된 재미를 추구할 여지를 남겼다. 실제로 퀘이크 2 엔진을 사용한 '하프라이프'가 원작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둔 사례는 이 비즈니스 모델의 성공 가능성을 증명했다. 기술을 선도하는 Id 소프트웨어와, 그 기술을 활용해 창의적인 게임을 만드는 다른 회사들이 함께 성장하는 윈-윈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업계의 거물,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갈등

존 카멕의 영향력은 하드웨어 업계로까지 확장되었다. 그의 말 한마디에 게이머들이 특정 그래픽 카드를 구매하는 현상이 벌어졌고, 그의 게임을 원활히 즐기기 위해 PC를 업그레이드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과거 3D 그래픽 카드 시장의 선두 주자였던 부두(Voodoo)사는 존 카멕이 자사 기술(Glide API) 지원 중단을 선언하자 급격히 몰락하여 결국 경쟁사인 엔비디아(Nvidia)에 인수되었다. 이 사건은 그의 막강한 영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전 세계 그래픽 카드 회사들은 그의 게임 엔진에서 자사 제품을 지원받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하지만 존 카멕은 특정 회사의 후원금에 좌우되지 않고, 오직 기술적 신념과 사용자 입장에서 최선이라고 판단되는 기술만을 지원하고 추천했다. 돈보다 기술적 원칙과 사용자 경험을 우선시하는 그의 태도는 전 세계 게이머와 프로그래머들로부터 더욱 큰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Id 소프트웨어 내부에서는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었다. '퀘이크' 제작이 본격화되면서 존 카멕과 실질적인 리더이자 수석 디자이너였던 존 로메오의 의견 충돌이 잦아졌다. 카멕은 오직 기술 구현과 최적화(속도)에 집착하며 개발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반면 로메오는 게임의 재미와 시각적인 화려함을 더 중시했고, 개발 과정에서의 즐거움과 외부 활동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카멕은 로메오가 개발보다 외적인 것에 치중한다고 느꼈고, 로메오는 카멕이 기술적 제약을 이유로 디자인 요구를 거부한다고 생각했다. "디자인은 법이다"라는 로메오와 "프로그래밍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카멕의 견해는 계속 부딪혔다. 결정적으로 카멕이 아마추어 레벨 디자이너 팀 윌리츠의 실력이 로메오보다 뛰어나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하면서 갈등은 극에 달했다.

결국 회사 내 파워 게임에서 밀린 존 로메오는 1997년 '퀘이크 2' 발매 후 회사를 떠나게 된다. 로메오가 떠난 후, 존 카멕은 사실상 Id 소프트웨어의 유일한 리더가 되어 회사를 이끌었다. 그는 '둠'과 '퀘이크'의 후속작들을 통해 끊임없이 최첨단 게임 기술을 선보이며 명성을 이어갔다. '게임 기술의 마에스트로', '프로그래밍의 모차르트'라는 찬사 속에서 그는 Id Tech 엔진 시리즈를 계속 발전시켰다. 2013년에는 VR 기술의 가능성을 보고 오큘러스 VR에 CTO로 합류하여 VR 혁신을 이끌었으며, 2019년 오큘러스를 떠난 후에는 인공 일반 지능(AGI) 연구라는 새로운 도전에 나서고 있다. 3D 게임의 시대를 열고 기술의 최전선을 끊임없이 개척해 온 그의 여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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